[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당신, 아웃이야!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당신, 아웃이야!
  • 백정우
  • 승인 2022.01.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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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가족-스틸컷
‘바람난 가족’ 스틸컷.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이 형제애를 강조했다면 한국의 86세대들은 동지애를 이상적 인간관계로 설정했다. 투쟁을 위해서는 가족이나 연인은 장애물이라 생각했다.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으로 거대한 이념의 패배자가 된 그들은 각박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가정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가정엔 믿고 의지할 아버지가 없었다. 자신도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한국의 핵가족 붕괴와 변화를 그린 임상수 감독 ‘바람난 가족’의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주영작도 그 중 한 명이다.

이 가족 한 마디로 개판이다. 온 가족이 바람을 핀다. 인권변호사 주영작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내연녀와, 그의 아내는 고등학생과, 그녀의 시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영작의 아버지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상태다. 감독은 바람을 매개삼아 중산층 가정의 성적 허위의식에 일갈을 날린다. 가히 여성의 반란이라 부를 만도 하다.

‘바람난 가족’의 남자들 즉 영작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입양한 아들도, 그리고 당연히 영작도 모두 죽거나 사라진다. 심지어 영작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 피를 토해낸다. 여성이 새 출발을 하기란 이토록 힘들다는 것. 즉 피를 토할 심정으로 지켜온 견고한 이데올로기가 남성가부장제란 얘기다. 남자의 죽음은 영작의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진 부계의 쇠락이다. 이들 가족의 부계란 전쟁 때 아내와 딸 여섯을 북에 둔 채로 아들만 데리고 피난 온 영작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남자 없는 여자들은 비로소 새 출발을 한다. 남편 장례를 치른 밤 영작의 엄마는 만나는 남자가 있고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통보 끝에 말한다. “나도 지금 이런 내가 아주 좋아, 아주 뿌듯해”

입양한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가정은 완전히 붕괴된다. 애초에 예견된 일이었다. 영작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건 가구까지 치워진 텅 빈 집안이다. 허울 좋은 중산층의 속살, 빈껍데기만 남은 허약한 가족주의의 민낯이다.

영화의 시작이 양민학살 유골발굴현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거창한 이념 뒤에 숨겨진(허위와 위선으로 디자인된) 한국사회의 단면에 다름 아니다. 불편하고 불쾌할 수도 있는 소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집이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문제라는 것, ‘바람난 가족’은 애써 밀쳐놓은 가족주의와 가부장제 폐해를 정면으로 전시했을 뿐이다.

영화의 엔딩은 아내를 찾아간 영작이 내가 잘할게, 라며 사과하는 장면이다. 아내는 단호하게 말한다. “뭘 잘해. 안 돼, 더 이상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데다 무책임한 남성을 무한대로 받아주는 가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뒤이어 날아와 비수같이 꽂힌 한 마디. 당신, 아웃이야! 남성주의 가부장제 역사를 여성주체로 새로 써야한다는 감독의 전언이다. 떠나는 영작과 남은 아내의 마지막 쇼트 위로 잔인할 정도로 얄미운 주제가가 흐른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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