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서 만남의 순간은 행복의 순간이다.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인가? 그리고 나아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나 역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2008년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착한 우리 엄마다. 평생을 7남매 키우신다고 고생만 하시다가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이제는 여행도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기셨는데 64세의 나이에 뇌졸중이 오셨다. 7년을 뇌졸중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우리 엄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본인은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난다. 직업별로, 나이별로, 성별로, 종교별로 말 그대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상처 준 사람’이다.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없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은 만큼 상처를 준 사람도 많아야 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보기는 정말 힘든 사람이다. 그 사람은 마치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나는 신화 속에 나오는 용(龍)과 같은 존재다. 있다고는 하는데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상처 준 사람’은 귀한 존재다.
부부상담을 할 때도 그 사람은 더욱 만나기 힘든 사람이다. 만약 처음 상담소를 찾아온 사람이 아내라면 그녀에게 상처 준 사람은 십중팔구(十中八九) 남편이고, 잘못은 남편에게 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남편은 정말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과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편이란 사람이 많은 잘못이 있어 보인다. 말 그대로 남편은 아내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다. 이제 드디어 상처 준 사람을 만나겠구나 싶어서 한 주간을 기다린다. 드디어 한 주가 지나고 ‘상처를 준 사람’인 남편을 만나는 날이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고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은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거꾸로 아내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다. 상처를 준 사람은 아내이고 잘못의 원인 또한 아내에게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 한다. 그리고 남편 입장에서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이며 자신은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참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상담을 받은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이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고만 하고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 한다. 그러면 누가 상처를 줬다는 말인가? 아내도 아니라 하고 남편도 아니라 하니 너무나 보고 싶다. ‘상처 준 사람’
정말 많은 사람이 남 탓을 하며 산다. 학교를 잘 못 간 것도, 결혼을 잘 못 한 것도 남의 탓이다. 돈을 벌지 못한 것도, 삶이 힘든 이유도 모두 남들 때문이라고 한다.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마지막에는 조상 탓도 한다. 남 탓을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원인을 바깥으로 돌리는 행위이다.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제일 취하기 쉬운 방법이 바로 원인을 바깥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문제의 책임은 나에게 없고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은 잠시 속은 편할지 모르나 발전이 없다. 그리고 해결도 어렵다. 잘못의 원인이 남에게 있기 때문에 남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 문제는 잘 해결이 되지 않는다. 모두 알다시피 자기 자신도 바꾸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바꾼단 말인가.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남 탓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인생에 주인공은 나이며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로 인생은 만들어져 간다. 그래서 앞으로 내 인생도 내가 선택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만나고 싶다. “제가 바로 상처 준 사람입니다.”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을.
나 역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2008년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착한 우리 엄마다. 평생을 7남매 키우신다고 고생만 하시다가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이제는 여행도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기셨는데 64세의 나이에 뇌졸중이 오셨다. 7년을 뇌졸중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우리 엄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본인은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난다. 직업별로, 나이별로, 성별로, 종교별로 말 그대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상처 준 사람’이다.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없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은 만큼 상처를 준 사람도 많아야 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보기는 정말 힘든 사람이다. 그 사람은 마치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나는 신화 속에 나오는 용(龍)과 같은 존재다. 있다고는 하는데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상처 준 사람’은 귀한 존재다.
부부상담을 할 때도 그 사람은 더욱 만나기 힘든 사람이다. 만약 처음 상담소를 찾아온 사람이 아내라면 그녀에게 상처 준 사람은 십중팔구(十中八九) 남편이고, 잘못은 남편에게 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남편은 정말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과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편이란 사람이 많은 잘못이 있어 보인다. 말 그대로 남편은 아내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다. 이제 드디어 상처 준 사람을 만나겠구나 싶어서 한 주간을 기다린다. 드디어 한 주가 지나고 ‘상처를 준 사람’인 남편을 만나는 날이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고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은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거꾸로 아내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다. 상처를 준 사람은 아내이고 잘못의 원인 또한 아내에게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 한다. 그리고 남편 입장에서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이며 자신은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참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상담을 받은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이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고만 하고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 한다. 그러면 누가 상처를 줬다는 말인가? 아내도 아니라 하고 남편도 아니라 하니 너무나 보고 싶다. ‘상처 준 사람’
정말 많은 사람이 남 탓을 하며 산다. 학교를 잘 못 간 것도, 결혼을 잘 못 한 것도 남의 탓이다. 돈을 벌지 못한 것도, 삶이 힘든 이유도 모두 남들 때문이라고 한다.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마지막에는 조상 탓도 한다. 남 탓을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원인을 바깥으로 돌리는 행위이다.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제일 취하기 쉬운 방법이 바로 원인을 바깥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문제의 책임은 나에게 없고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은 잠시 속은 편할지 모르나 발전이 없다. 그리고 해결도 어렵다. 잘못의 원인이 남에게 있기 때문에 남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 문제는 잘 해결이 되지 않는다. 모두 알다시피 자기 자신도 바꾸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바꾼단 말인가.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남 탓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인생에 주인공은 나이며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로 인생은 만들어져 간다. 그래서 앞으로 내 인생도 내가 선택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만나고 싶다. “제가 바로 상처 준 사람입니다.”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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