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살인을 저지른 남자, 폭력과 불법을 자행하며 살아온 태식에게 가족의 존재란 오래전 지워졌을 게 분명하다. 절망의 공간에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찾아와준 누군가를 인식할 때, 피해자의 어머니를 의지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해바라기’는 살인죄로 복역하다 가석방을 얻어 사회에 복귀했으나 다시 주먹을 쓸 수밖에 없는 한 사내의 처연하고 비통한 이야기를 가족로망스의 외피로 둘러낸 영화이다.
태식이 감옥에 간 뒤로 무주공산이 된 장유시를 정치 경제적으로 장악한 시의원 조판수의 숙원사업은 쇼핑몰 건립하는 것. 문제는 부지매입에 걸림돌인 덕자의 해바라기식당이다. 요지부동인 덕자도 골칫거리인 마당에 설상가상으로 한 때 이 지역을 장악했던 태식이 출소하여 덕자의 양아들이 되어버렸다.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의 출현과 하필 고집스런 덕자의 식당에 안착한 태식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서부극의 그것과 흡사하다. 어느 날 마을에 흘러들어온 총잡이를 주시하는 주민들처럼, 태식의 주변인들 뇌리에는 (현재의 어눌하고 평범한 모습이 아닌) 구전으로 전설이 된 과거 행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설의 주먹을 상기시키고 그의 행보를 주시하는 동안, 태식이 활극의 주인공으로 돌아와 최후의 한판을 펼친 후 절멸하기를 바라는 듯 집요하게 그를 추동하는 것은 무능한 경찰과 조판수의 패거리뿐만이 아니다. 과거를 잊고자 하는 남자와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가족로망스를 위협하고 마침내 파괴하여 “그렇게 꼭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는 태식의 절규를 불러낼 때, 관객이 태식에게 바라는 것 또한 장대한 핏빛 복수극이다.
결국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남성성을 빌려 폭력은 소멸되고 악은 제거되며 가족로망스는 신화로 남는다. 장르영화의 미덕이 소재가 아닌 형식에 있음을 감안 한다면, 빤한 이야기구조 속에 예견된 결말을 향하는 것이나 도식적 플롯의 반복은 일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성 중심의 가족집단과 가부장적 폭력집단 사이의 대결구도와 내부 갈등을 통해 남성성의 허상과 가벼움을 드러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남성성을 강화한 것은 평단의 비위를 거스른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가 그려내는 가족로망스는 오히려 보아줄 만하다. 게다가 거친 남성성이 가족과 가정이라는 낯선 공간과 조우하여 순화되는 동안,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키며 구연동화처럼 이야기를 펼쳐가는 감독의 재능이 밉지 않다.
누군가 그랬다.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몸속에서 물이 빠져 나가는 것과 같지만 남자가 흘리는 눈물은 심장 속에 피가 빠져 나가는 것’과 같다고. 끝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태식의 비통함이 분노로 치달을 때 “술 마시지 않겠다. 싸우지 않겠다. 울지 않겠다.”고 적힌 그의 행복수첩은 핏빛으로 물들어가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약속은 깨져도 좋다는 믿음과 행동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