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여름의 끝
[달구벌아침] 여름의 끝
  • 승인 2022.08.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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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천둥과 번개, 비바람,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걷는다. 여름의 끝자락이다. 거실 창문 밖, 담쟁이넝쿨이 장맛비에 한껏 젖어 초록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벽면을 다 채우고 올라선 자리 다시, 옥상 바닥인 줄 까맣게 모른 채.

반고개역 지하도를 빠져나온다. 여름의 막바지 햇살이 선인장 가시처럼 온몸에 박힌다. 바람 한 점 걸치지 않는 나신의 몸으로 햇발은 지하도를 빠져나가는 출구를 막아선 채 진을 치고 있었다. 폭염을 피해 지붕이 드리워져 있는 건물 아래를 골라 나란히 걸어가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응달이라고, 지붕으로 가렸다고 더위가 한풀 꺾였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대답했다.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눈치를 살피던 중이었다.

“그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양지만 있다면 어떨까. 그나마 응달 덕분에 양지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같아. 신호등처럼 골라 사는 재미도 있을 테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견디고 이겨냄으로써 더 큰 가치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얼굴에 드리워진 응달이 살짝 걷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했다.

“와! 그래도 친구라고 젤 낫네. 시 쓰더니만 참, 위로도 고상하게 한데이. 그래 웃자 웃어넘겨 버리자. 우짜겠노. 이미 지나간 일 되씹으면 머 하겠노. 날도 더븐데. 우선 햇빛을 피하고 보자. 빨리 가서 맛있는 밥이나 묵자. 내가 살게”

외국으로 파견근무 나갔던 남편이 현지처를 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정년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랫사람들은 치고 올라오고 더 이상 올라 설 데가 없었던 가장의 자리는 사표를 쓰든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든지 그마저도 어려워 아예 외국 지사로 5년의 계약기간을 두고 가족과 떨어져 파견근무를 선택했던 것이라는데 그만….

황혼이혼이 유행인 요즘이라고들 하지만 결혼을 앞둔 아이를 두고 이혼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남편 그늘에서 평생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타 쓰며 살다 보니 지금에 와서 혼자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엄두도 안 날뿐더러 자신이 그렇게 못나고 한심해 보이지만 그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이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십만 되었어도 용기를 한 번 내볼 텐데. 설거지라도 해볼 요량으로 구직난을 뒤져봤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써 줄 데라곤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입추가 지났음에도 기후변화로 인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횡단보도 건너 밥집을 향해 걸으며 살포시 그녀의 팔짱을 껴본다. 자식들 모두 떠나보낸 후, 반려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며 느끼며 내가 쓴 ‘그, 냥’이라는 시의 전문을 그녀의 귓가로 조심스레 흘려보낸다.

“그, 냥 그냥/ 저, 냥 저냥/ 마, 냥 마냥/ 서로, 서로의 그림자만 키우며 사는/ 우리”

젊은 엄마가 아이를 업고 또 걸리며 우리 앞을 지나간다. 혼자도 더운데 아기 엄마는 오죽할까? 요즘 같은 날, 특히 더 고되고 힘들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덥다고 해서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려 들지는 않을 테고 그건 엄마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삶이 고되고 지치지만 그런데도 견딜 수 있는 이유 또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뙤약볕 아래 무더위를 견뎌내느라 우린 너무 많은 땀과 에너지를 과소비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나 한 몸 챙기고 살기에도 힘에 부칠 때 간혹 있지만 보살펴야 할 것들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내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한 고통만이 아닌 기쁨이 되고 성장을 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어느 그늘에서건 쉬는 사람이 있으면 그 휴식을 방해하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걷게 된다. 그만큼의 배려라 할지라도 서로 나누어야 할 계절 위에 우린 서 있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이 잠시 그늘에 쉴 때만이라도 일상을 가득 채운 복잡하고 서러운 것들 모두 다 잊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뜨거운 계절만큼 서로에게 애썼다는 위로를 나누며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 모두 다 아물 수 있기를 앞서 걷는 그녀의 등을 잡아끌며 바라본다.

‘실수는 발견의 시작’이라고 한다. 어느 계절이건 끝이 있는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어 모두의 마음과 마음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었으면 좋겠다. 하루를 다한 햇빛이 주홍빛 노을 속으로 총총 기울어 간다. 다시 캄캄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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