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 민화이야기]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환경에 영향 받지 않은 메추리에 자아를 투영하다
[박승온 민화이야기]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환경에 영향 받지 않은 메추리에 자아를 투영하다
  • 윤덕우
  • 승인 2022.12.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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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리 잘 그려 별칭도‘최 메추리’
누더기처럼 행색 볼품없는 새
장소 상관없이 어디서든 둥지
안분지족하며 사는 성인 상징
때론 싸움닭 같아 용기 뜻하기도
붓으로 먹고 산다고…號 ‘호생관’
산수화에도 일가견 있었던 그
구도·필묵 등 독자적 양식 구축
전북 무주에 건립된 최북미술관, 숨은 천재화가 생활 엿볼 수 있어
2022년 12월 끝자락에서 (사) 한국현대민화협회 회원전이 대구 봉산문화회관 제 1 전시실에서 개최되고 있다. 여덟 번째 회원전을 이어오면서 회원들의 그림의 분위기가 세련되고, 색의 깊이와 화면의 구성력 알차게 성장하고 있어, 화가로서도 그 면모가 갖추어지는 것 같다.

필자 역시 시쳇말로 인생 부캐로서 화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핑계로 짬짬이 붓을 움직여 보지만 내 그림에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화가의 길은 끝이 없고, 어디가 도착점인지 알 수도 없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 민화이야기에서 작품으로 소개했던 조선시대 최초의 직업 화가인 최북을 소개하고 평생을 붓 하나에 의지해 먹고 살았던 화가로서의 삶을 엿보고자 한다.

최북(崔北, 1712년 ~ 1760년)은 조선 숙종, 영조 때의 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유용(有用)· 칠칠(七七), 호는 호생관(毫生館), 월성(月城), 성재(星齋), 기암(箕庵), 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 둥이 있다.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서 자를 칠칠(七七)로 지었으며, 붓(毫) 하나로 먹고 산다(生)고 하여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고 지었다.

흔히들 조선시대 화가 변상벽을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변고양이라 부르고, 조선시대 나비의 대가인 남계우를 남 나비라 부르는 것처럼 최북 역시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崔순) 즉, 최 메추라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10여 년 전인 2012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최북 탄생 300돌 기념전 ‘호생관 최북’전을 개최하였다. 그 시절 신문 기사를 살펴보니 최북을 ‘조선 판 고흐’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많았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그동안 이야기만 무성했던 최북의 삶을 그림 자체로 투시해 본 전시였다. 여러 기행들로 윤색된 괴짜 화가 ‘칠칠’이 편견의 산물임을 출품작들은 증언한다. 학예사들이 악전고투를 통해 한자리에 모은 57점의 산수화· 화조· 영모화들은 최북이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고, 고결한 문인 세계를 선망했던 지식인이었음을 일려주었다.

자 이제 최 메추라기로 불렸던 그의 메추라기 작품을 들여다보자.

메추라기는 딱! 봐도 못생겼다. ‘메추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몸집이 작아 앙증맞기는 커녕 꽁지가 짧아 흉한 몸매를 지녔다. 한자로 메추라기 ‘순(순)’은 ‘옷이 해지다’라는 뜻도 있다. 터럭이 얼룩덜룩한 꼴이 남루한 옷처럼 보인다. 암수 모두 깃털이 특별히 곱거나 아름다운 새는 아니며 몸집은 닭보다 작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메추리의 작은 알은 장조림 등 요리로 활용되기도 하고, 조선시대부터 고기 맛이 알려져 사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북녘 일부 지역에는 텃새도 있는 것으로 전하나 겨울철새로 숲이나 풀밭에 무리 지어 산다. 한자로 메추리는 암( )· 순(순)· 료( )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선 순(순)이 주로 쓰인다. 오랜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오경(五經)>에 속한 <시경(詩經)>에도 등장하며, 우리나라도 이 새를 주제로 한 시들이 여럿 알려져 있다. 성질은 대체로 부드럽고 순하며 철새로 떠돌이 생활을 한다. 꽁지깃이 없어서인지 잘 보이지 않으며 외모는 기운 누더기 같으며, 작은 풀을 만나도 피해 돌아간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만족하며 사는 소박하고 순박함을 지녔다. ‘성인의 삶은 메추리 같이 사는 것’이란 뜻의 성인순거(聖人순居)와 ‘백번 이은 누더기 옷’이란 뜻의 현순백결(懸순百結) 등 메추리가 들어간 사자성어가 의미하듯 메추리는 덕성(德性)을 지닌 새이다. 순거(&#40329;居)는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음을 뜻한다. 성인은 환경에 지배되지 않으니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현순(懸 )은 누더기 옷이니 가난 속에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함을 의미한다. 한편 몇 마리 메추리 앞에 수수를 뿌리면 싸움닭, 투계(鬪鷄)처럼 싸워 이긴 녀석이 수수를 독차지 해 용기(勇氣)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외모로만 판단할 일은 아닌 모양이다.
 

메추라기-간송미술관
<그림1> 최북 작 메추라기 25.5×17.7cm 지본담채 18세기 제작 간송미술관 소장.

메추라기 두 마리가 조 이삭 밑에서 거닌다. 한 마리는 촘촘한 이삭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고,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진 낟알을 부리로 쪼고 있다. 모처럼 먹을거리 풍성한 곳을 찾아다닌 까닭인지 한결 통통하게 살이 오른 놈들이다. 조는 기장처럼 알곡이 작다. 하도 작아서 조와 기장은 가끔 ‘소득 없는 짓’에 비유된다. ‘순자’에 이르기를 ‘예(禮)와 의(義)에 기대지 않고 시서(詩書)를 읽는 것은 창으로 기장을 찧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도 조는 어엿한 오곡중 하나인 곡식이다. 조는 벼(禾)과의 곡식으로, 풍성한 결실을 상징한다. 해서 메추리와 조를 함께 그린 그림을 가리켜 <안화도(安和圖)>라 부른다. 안(安)은 메추라기암(&#40298;)과 중국 음이 같고, 화(和)는 화(禾)와 소리가 같기 때문에, 화평하게 복을 누리고 살라는 축원의 의미가 있다. 가난하지만 어디서든 만족하는 삶을 사는 메추리를 즐겨 그린 것은 최북 자신도 이 새에 담긴 뜻을 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최북은 산수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최북이 살았던 시기는 영·정조 시대로 화풍은 명나라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받아 들여 독자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화풍으로 발전시켜 나간 조선시대 회화사에 황금기를 맞이하는 시대, 즉 조선에 있어서는 르네상스,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질 정도로 학문과 문화의 전 분야가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려했던 시기였다. 이 시대의 화풍은 크게 겸재 정선에 의한 진경산수와 현재 심사정의 남종화풍이 형성 되었다.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그림2> 최북 작 산수도 견본담채 61.5×3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무진년(戊辰年 1748년) 제작된 것으로 구도와 경물의 형태, 준법과 수지법, 필묵법, 전체적인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중국 명대의 유명한 화가인 심주(沈周, 1427년 ~ 1509년)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근경(近景)으로부터 원경(遠景)에 이르기까지 경물(景物)들이 유기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공간을 이루었고, 입체적으로 표현된 낮고 높은 언덕과 주산의 모습들이 심주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요소별 기법, 즉 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한 태점의 표현이나 나뭇잎의 둥근 필체법 등은 최북화풍의 특징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이미 최북만의 독자적인 표현양식과 태도가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현대에 이르러 최북을 ‘조선 판 반 고흐’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평가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반 고흐처럼 최북 역시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행동으로 붙여진 것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한쪽 눈이 감겨 있는 최북의 초상화도 있었지만, 오늘의 이야기에서는 굳이 첨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메추라기 그림처럼 볼품없고 기이한 화가의 외모가 아니라 최북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몰입으로 자신의 화풍을 완성한 직업화가로만 독자들이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전라북도 무주에 가면 최북 미술관이 있다고 한다. 원래 최북은 본은 경주 최씨 이지만, 전라도 무주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역사적인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무주인이라는 기록은 조병유(趙秉瑜)의 <적성지(赤城誌)>,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진휘속고(震彙續考)>와 <일사유사(逸士遺事)>,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최완수의 <화가약전 家略傳)>등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최북이 경주 최씨의 후손이었으나, 무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기질대로 무주 최씨로 자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 의미로 무주에 최북 미술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올 겨울 휴가를 무주에서 보내기로 했는데 최북 미술관은 꼭 들러봐야겠다.

학창시절 그림을 전공하는 필자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없어 보여 일찌감치 화가로서의 길은 가지 않겠다고 포기했었다. 그 이유는 천재화가로서의 미술적 재능도 없어보였고, 그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호 ‘호생관(毫生館)’처럼 평생을 붓끝으로 세상을 그려내리라는 굳은 용기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많은 분들께 최북에 대해 소개하고 싶었다. 김홍도나, 심사정, 정선등과 같은 시대를 향유하던 숨은 천재화가로서 붓으로 세상살이를 하는 화가도 있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자님 말씀 중에 “내가 좋아하는 바를 하면서 살겠다.”라는 내용이 있는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을 인용해본다.

“자왈(子曰), 부이가구야(富而可求也). 수집편지사(雖執鞭之士). 오역위지(吾亦爲之), 여불가구(如不可求), 종오소호(從吾所好)”

나이 들어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려내는 필자에게 그래도 험난한 길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계속 그 길을 쫓아가 보겠다는 노력과 약속을 많은 분들 앞에서 다짐해 보면서 한해를 마무리 해본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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