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울음터를 찾아서
[달구벌아침] 울음터를 찾아서
  • 승인 2023.0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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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해가 가고 오고 하루도 떴다 기운다. 꽃은 피고 지고 만장으로 펄럭이던 나뭇잎은 속절없이 낙엽 되어 골골마다 수북하다. 한파 속 드문드문 한가로운 햇살이 쌓인 낙엽 위로 맥없이 떨어져 바스러진다. 골목과 담장을 따라 구석구석 운집을 이룬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칼바람이 스친다. 몇 잎 남지 않은 잎사귀마저 몸을 떨다가 흩날린다.
을씨년스러운 조락은 허무를 짙게 한다. 금세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가뭇한 하늘을 머리에 인 채, 할 일을 다 마친 탈속한 성자처럼 창문 밖 붉은 꽃망울을 품고 있는 매화의 자태가 고절하다. 구정 지난 다음 날 휴일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으려던 바로 그때 남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였다.
"박 서방, 내가 너무 서운하네. 명절이 지나가도록 전화 한 통 없이 그리도 무심할 수 있는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밤새 한잠을 못 잤네. 걱정돼서"
결혼 후,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내 불찰이다. 구정 전, 엄마로부터 몇 통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도 전화를 걸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간에 '괜찮다고 별일 없다'며 말 한 마디면 될 것을 가라앉은 내 목소리만 듣고도 엄마가 걱정할까 봐 모른 척 외면한 것이 오히려 화를 키운 셈이다. 자기 탓이라며 미안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남편이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손주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퇴원 후 안정을 찾으면 보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엄마 맘을 더 아프게 했네. 미안해"
엄마의 한숨과 걱정, 연민이 전화선을 타고 폭포수처럼 내리꽂히더니 흘러넘친다. 긴장과 두려움에 애간장을 태우느라 돌아볼 여유가 바닥난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랬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애매한 울 사위를 잡았네. 그러면 그렇지, 박 서방이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다. 손주는 괜찮나? 그래도 나는 증손주보다 네 딸보다 내 딸이 더 걱정이다.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최악의 한파에 동파된 수도관처럼 수도꼭지를 트니 울컥 쏟아져 나온 수돗물처럼 그간의 묵었던 설움이 왈칵 눈 밖으로 쏟아져 나와 흐른다.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밥상을 물리고 앉아 함박눈이 내리듯 펑펑 울었다. 잠그려고 하면 할수록 곁가지로 삐져나온 물줄기가 고드름처럼 가슴에 맺혔다가 풀리기를 반복한다.
"그리우면요/ 그립다고 말하세요/ 여전히 내게는 당신이라 더 그리워질까 봐/ 말못했다구요// 참다 참다/ '잘 지내지?' 아무렇지 않은 듯 안부 한 줄/ 필사한 가슴을/ 계절풍에 맡겨 보세요// 어쩜, 그 사람도/ '잘 지내지?' 허공에 두 줄/ 답장을 띄웠을지 몰라요/ 비행운 긴 꼬리 같은// 봄 대신/ 하얀 뭉치 꽃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안부를 끄덕끄덕/ 묻고 있어요// 말하면 눈물부터 날 것 같아/ 일부러 꾸욱/ 다물고 살았던,/ 울먹꽃이 다시 피었다구요"
김부회 시인의 '울먹꽃'이 화장지가 되어 눈물을 태운다.
가끔 나는 울고 싶을 때 차 안에 든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을 찾아 차를 세워놓고 운다. 함성을 지르며 노래를 부르듯 막무가내로 운다. 울고 나면 막힌 속이 십차선 고속도로처럼 뻥 뚫리곤 한다. '무엇을 원망하는 것도 아닌, 일상의 터널에 잠겨버린, 오직 스스로를 향한 설움의 만개(滿開)다.' 울고 나면 아무리 심각한 고민도 고통도 부정한 마음도 긍정의 마음으로 돌아서곤 한다. 장석남 시인은 말한다. '그 울음은 삶을 지탱시키는 거름인지 모르네. 그 울음터를 찾아 우리는 멀리 여행을 가는 건지 모르네. 오래 혼자 있고 싶은 건지 모르네. 입산하고 싶은 건지 모르네.'라고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가장 사소한 시간 속에서 행복은 찾아지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올 때가 많다. 느닷없이 어느 날 병이 오고 또 어느 날 힘겨운 일이 찾아오는 것처럼. 나무 그늘로 바람이 살랑인다.
처음처럼, 낯선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익숙한 계절 앞에 서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헐벗고 선 나무들을 보면서 생의 겨울을 마중물처럼 쏟아 부어 본다. 단풍나무, 벚꽃, 화살나무 등 적절하게 물이 잘 뱄다 흩어지고 사라진 지금, 홀몸으로 선 채 떠나보낸 잎들을 떠올리며 엄마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왕만의 시를 읊으며 "밤이 다 새기 전부터 바다 밑의 해는 떠오르고/ 한 해가 다 가기 전부터 강에는 새봄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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