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만성통증과 감정의 해상도
[의료칼럼] 만성통증과 감정의 해상도
  • 승인 2023.02.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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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행복한재활의학과 원장, 대구시의사회 논설위원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행복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전남대 정신건강의학과 원로교수님께서 그 답을 성격이라고 하는 강연을 보았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답이다. 성격이란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반복되는 ‘행동패턴’을 말한다. 행동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변수가 바로 감정이기 때문에 성격의 가장 큰 부분을 감정이 차지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감정도 모니터처럼 해상도가 있다. 모니터의 해상도가 낮으면 장면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감정의 해상도가 낮으면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표현 대신 두루뭉술한 표현을 하기 쉽다.

만성통증을 가진 환자분들 중에도 “기분이 좋다/나쁘다” 정도의 매우 포괄적인 표현만 하는 경우가 있다. 감정의 해상도가 높으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감정을 통해 가장 적절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효과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행동(말, 글, 표정, 특정행위)은 개인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데 잘못 선택한 행동은 환경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감정의 해상도가 낮은 경우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만성통증을 가진 환자들 중 특별히 감정의 해상도가 낮은 환자들은 감정의 밑바탕에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성통증 환자들 중 상당수가 불안에 물들어있다. 밤에 잠들 때 까지도 통증에 시달리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여전히 통증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면 이런 일들이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평생 이어질까봐 불안하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불확실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 불확실한 것은 알고 나면 문제가 사라진다. 그러니 불안한 감정을 느낄 때는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불안한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분노하거나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분노는 불안과는 달리 위협의 대상을 제거하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그래서 분노한 사람은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다. 문제는 실제 자신의 감정이 불안이라면 실체를 알아보려는 호기심이 필요한데, 분노라고 잘 못 판단한 경우에는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공격적인 행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마련이다. 잘못 선택한 행동의 밑바탕에는 잘 못 알아차린 감정이 있다.

때로는 불안을 공포로 인식하기도 한다. 공포는 위협의 대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그 밑바탕에 있다. 안타깝게도 만성통증은 호랑이가 아니라서 피해서 달아날 수가 없다. 만성통증은 자신의 뇌 속에 함께 사는 식구와 같다. 만성통증은 화를 내면서 쫓아내거나 두려운 마음으로 피해서 달아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피하지 말고 정확하게 관찰해야 할 대상이다.

만성통증 환자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엉뚱한 행동을 선택하게 되고 이것은 만성통증이 자신의 뇌리에 더욱 깊게 각인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물론, 그 행동의 결과는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꼭 필요한 감정적 지지와 이해를 저 멀리 날려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만성통증 환자분들은 더욱 쓸쓸하고 힘겨운 날들을 겨우 버티면서 오늘도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 불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더라도 불안의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주인공인 욕구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불확실성에 대한 막연한 걱정은 최악의 상황과 최선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소할 수 있다. 만성통증은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악의 경우라도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없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최악의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조바심을 내려놓고 호기심으로 연구하듯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다면 좋겠다.

물론, 만성통증 환자분들 중에 우울감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 정도의 용기를 내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의사가 이분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의사가 그 감정의 밑바닥에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챈다면 만성통증 환자분들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만성통증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진통제를 잘 쓰고 신경차단술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감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MRI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 못지않게 의사가 가진 감정의 해상도도 높아지면 환자들의 고통의 총량이 줄어들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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