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오후 3시의 고함
[좋은 시를 찾아서] 오후 3시의 고함
  • 승인 2023.03.0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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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희
남주희 시인

E 마트 시간별 소고기세일 앞에 줄을 선다 목청을 높여 사람을 모으는 귀싸대기 새파란 청년 눈에 들어온다 생의 외피를 하나씩 벗겨내어 잔칫날 한가락 뽑듯 악악 목청을 높인다 똑바로 서라는 고함에 고분고분 뒤꿈치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명령어에 줄을 댄다 소리의 데시벨이 점점 커지고 불량기가 없어 보이는 저 청청한 목둘레, 푸른 정맥이 불룩거린다 100그람에 1,000원이라는 곧 거들날 것 같은 힘줄

막내아들 쯤 되어 보이는 등짝에 슬몃 기대어 3년 재수, 반건달로 뒹구는 내 아들놈을 본다

죽은 기억과 산자의 팽팽함이 잠시 기우뚱 댄다

겸허하게 받아야 할 성찬을 마주하듯 나는 지금 무서운 회초리 앞에 반듯하게 서 있다

신새벽 찬바람에 따끈한 아침밥을 지어먹인 제 어미의 기도도 이렇듯 반듯했으리라

◇남주희= 2003년시인정신 최우수상 등단, 현대수필 등단. 한국민족문학상 본상, 김우종문학상 본상. 2021년 대구 문화재단 기금 수혜. 시집 ‘눈부신 폭서’ 외 5권, 산문집 ‘조금씩 자라는 적막’ 이 있음.

<해설> 오후 3시가 주는 시간적 의미가 궁금하다. 아마도 소설가나 시인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시간 오후 3시는 지나온 시간을 되돌리기에는 왠지 늦은 감이 있고, 그렇다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시간임에도 시인은 지금 세일로 판매되는 소고기 매장 앞에서 똑바로 서라는 고함에 고분해지고 있다. 먹지 않고는 살수 없다는, 어떤 압력에 굴복 당한 듯도 보이지만, 시인의 상상은 겸허하게 받들어야 할 성찬 앞에서 아들을 데려와 세일을 외치는 청년과의 대비를 통해 혹은 점원의 어미와 자신이 다르지 않을 것임에, 저녁이 몰려오기 전 눈앞에 펼쳐진 일상의 한 장면을, 이게 오늘의 풍속도인 듯, 한 땀 한 땀 따끔한 수를 놓고 있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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