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면접 등 새 방식 시도
토익점수보다 창의성 중요해져
대학 졸업 후 문경에 자리잡고
문화자원 발굴·유적지 재조명
웹툰·영상·굿즈·교구 등 제작
“지방은 할 수 있는 일 넘쳐나
다만 스스로 찾는 노력 필요”
◇서울이라는 스펙
청년이 당면한 문제상황과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가 ‘스펙’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청년들은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스펙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유는 ‘취업’이다. 과거에 비해 취업하기가 어려워진 사회·경제적 이유로 청년 간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장기화된 경제불황으로 채용의 문을 활짝 열 수 없는 기업 또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채용절차를 고민하고 시도하게 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다녔던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취업 5대 스펙이 유행했다.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이 그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기존의 5대 스펙에 봉사, 인턴, 수상경력까지 더해진 취업 8대 스펙으로 늘어나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물론 이런 스펙을 요구한 주체는 없다. 또한 어렵게 쌓은 이러한 스펙이 취업 후 직장에서 요긴하게 활용된다는 보장도 가능성도 희박하다. 스펙은 취업을 갈구하는 현실청년에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와 자세를 증명해 보이라는 현시대의 ‘주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최근 필자가 많이 받는 질문들에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서울’이라는 스펙을 놓치면 미래의 기회까지 놓쳐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지방에서도 취업 준비가 가능할까요?”, “첫 직장이 지방이면 경력관리가 어렵지 않을까요?”라는 질문들 속에는 서울이라는 스펙을 놓치기 싫은 막연한 간절함이 서려 있다. 필자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2017년, 문경에서 처음 만났던 박현희 대표(주식회사 엘오알오)의 사례를 통해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나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나만의 스펙’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최근 몇 년간 대기업 채용과정에는 분명한 지각변동이 있었다. 서류와 필기시험에 중점을 두고 통과의례처럼 행해지던 면접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기업에서는 스펙을 전혀 보지 않은 채 블라인드 인터뷰를 시행하기도 하고, 면접관과 수험생들이 하루를 함께 보내며 평가하는 다차원 면접을 시행하기도 한다. 또 수험생들끼리 서로를 평가하게 하는 동료평가 면접도 시도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스펙 위주 인재 등용의 한계를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스펙 위주의 지식형 인재가 필요했다면 현재는 조직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게 된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기업들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방법이나 절차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나만의 스펙과 창의력이 필요
교복을 입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부터 문경을 주 무대로 20년째 자신만의 스펙을 만들어온 박현희 대표의 사례는 간절히 취업을 갈구하는 현실 청년들에게 ‘찐 스펙’이란 무엇인지 귀감을 주고 있다. 박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일찍 깨닫게 되어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현재를 살아가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냥 좋아서 시작했던 그림은 ‘비루빡’이라는 벽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졌고, 남다른 근면성실함으로 임한 봉사활동은 자신만의 특별한 스펙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펙은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대학 입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사회에 나와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과정 속에서도 자신을 표현하는 특별한 포인트로 작용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림은 제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죠. 문경에는 푸른화실 천금량 선생님이 이끄는 ‘비루빡’이라는 벽화 봉사 단체가 있어요. 거기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가 많이 바뀌게 된 것 같아요.”
박대표는 디자이너로서의 문경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대학 졸업 후 수도권을 무대로 자신의 꿈을 펼쳐 볼까도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듯 멀지 않은 미래에는 ‘나만의 스펙’이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만의 스펙’은 서울보다 지방이 더 유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했기에 대학 졸업 후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011년 무렵에는 입학사정관제도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입학사정관제도는 학생의 잠재력과 소질, 활동 이력 같은 다양한 특성을 반영해서 뽑는 거잖아요. 입학사정관 대입 면접에서 분명하게 기억 나는장면은 제가 생각하는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무장했던 제 모습이에요. 저는 그때 그 모습이 그림을 마주했던 제 초심이라고 생각하고 종종 회상하곤 합니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이 사회는 10여 년 전 제가 대입을 준비했을 당시의 모습을 청년세대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저는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의 세계가 무엇인지 실행관점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고, 활동이력을 통해 증명해 보일 수 있었어요. 남들과는 다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자신의 성장은 물론 기업의 성장까지도 견인해 낼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자신만의 스펙으로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이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한 미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동료들과 만들어낸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스펙트럼의 확장
지역에 돌아온 박대표는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하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역에서 조명하지 않은 문화자원의 발굴과 스토리텔링, 그리고 디자인 작업이었다고 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맥락이 분명한 디자인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역사문화를 발굴하는데 집중했죠. 문경 가은면에는 견훤과 관련된 많은 전설이 있고, 조명되지 않은 유적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포인트로 사업초기 3년간 다양한 시도를 했었던 것 같아요. 웹툰작업도 했고, 영상작업, 굿즈제작, 교구제작 등 제가 디자이너로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제품의 스펙트럼을 넓혀 나갔죠”
문경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 박현희’로서 활동영역을 넓혀 가던 어느 날, 지역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청년(동료)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들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박대표는 문경의 청년협의체 ‘가치살자’를 통해 행정안전부 청년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도권 청년들이 지역을 바라보는 인식적 전환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달빛탐사대’라는 프로그램을 협의체 구성원들과 함께 기획해 우수사례로서 평가받게 되면서 지역 사회에서 ‘로컬 디렉터’라는 자신의 역할을 추가로 새롭게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 했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궁무진한 일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 추가로 요구될 뿐이죠. 그런데 이런 작업들이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스펙이 될 수 있는 거죠.”
문경을 대표하는 청년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활동영역 확장은 물론 지역의 미래까지도 함께 고민하고 실행으로 옮기고 있는 박현희 대표의 사례는 자신의 꿈을 찾아 ‘대도시 대기업으로의 취업’을 갈구하는 현실 청년들에게 이 사회가 요구하는 ‘찐 스펙’이란 무엇인지 귀감을 주고 있었다.
이미나(청년활동연구가/교육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