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담백함이 그리운 날엔
[백정우의 줌인아웃] 담백함이 그리운 날엔
  • 백정우
  • 승인 2023.06.0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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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여행기
‘박하경 여행기’. 웨이브 제공

코로나19 동안 OTT서비스를 달군 시리즈물들. 한국영화 위기를 말할 정도로 영화 팬을 TV앞에 꽁꽁 묶어둔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센 소재, 예컨대 목숨을 건 게임과 마약밀매와 복수극과 도박·살인청부 등이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이나영의 ‘박하경 여행기’. 이 작품, 묘하게 빠져든다. 감동도 신파도 폭력도 스펙터클도 없다. 심지어 여행기에 먹방도 없다. 간결하고 정갈하다. 흰색 면 침대보에서 나는 햇빛냄새 같다. 주름진다 싶으면 링클 프리처럼 구김살 없이 바로바로 원형을 복원한다.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 동안의 여행이다. 하루가 넘고 몇 박이 붙으면 지저분한 인연과 미련이 껌 딱지처럼 붙어 따라오기 마련. 때론 오물 뒤집어 쓴 것 같은 사건사고에 휘말려 잊을 수 없는 흑역사가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 또는 로맨스 따위 말이다. 하루에 끝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하루에 모든 걸 끝내려면 둘 중 하나다. 치밀하게 계획하거나 맘 가는 대로 발길을 돌리고 시간 되면 돌아오는 버스에 미련 없이 몸을 싣는 것.

내가 ‘박하경 여행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행이란 서로 만날 일 없는 것들이 만나가는 이야기의 축적이다. 여행자 중심이어야 할 여행기에서 우리가 주로 만나는 건 맛집과 카페와 풍경 그리고 종종 고양이가 아니었던가. 여행자의 마음은 온데 간 데 없고 동화나라처럼 예쁘고 그럴싸한 풍경이 여행을 대신하는 현실. 반면 ‘박하경 여행기’는 풍경과 공간이 아닌 여행자 박하경 내면의 흐름을 따라간다. 시종 넉넉한 여백을 펼치며 관람자의 시선을 재촉하지 않는 미덕마저 갖췄다.

이종필 감독은 25분 내외의 에피소드에 핵심만 담는다. 즉 해남과 군산과 부산과 속초 어느 곳도 도시 역사와 명소 등의 설명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뻔한 정보는 애초에 제거해버렸다는 것. 박하경은 최소한의 정보만 들고 떠난다. 오직 필요한 건 떠나겠다는 마음이고 결심이다. 하루만으로도 충분한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각 에피소드 오프닝 내레이션마저 명쾌하다. 해남은 “잘못 내린 거 같다, 잘못 내렸다.”이고, 이후로도 “군산은 처음이다” “속초는 오랜만이다”로 시작한다.

여타 로드무비의 인물들이 도시를 헤집고 다니며 좌충우돌할 때 박하경은 차분하게 자기 마음을 읽어나간다. 홍상수의 인물들, 즉 삶을 지속시킬 형식도 가족도 직장도 없는 한심한 사내들이 낯선 곳으로 향하지만 매번 어긋나고 출발한 자리로 돌아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박하경은 어엿한 고등학교 국어선생이고 지정된 장소에 가서 목적을 이룬다. 그리고 하루 만에 어김없이 돌아온다. 일상을 유지하다가 사라져버리고 싶을 땐 훌쩍 떠날 수 있는 삶의 충분한 터전이 뒤받치고 있다. 어둑살이 내리는 밤, 속초에서 만난 고집불통 노인에게 건네는 다정함도, 출발한 곳으로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일 터.

어느 날 동갑내기 평론가가 말했다. 나이 들면서 사람 죽이는 영화보다 살리는 영화가 좋아지더라고. 나도 ‘박하경 여행기’가 좋은 건 그래서인가보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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