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수출지향형 정책 추진
경공업→중화학·전자로 전환 시도
구미, 국가산업화 모델도시로 육성
1969년 국가산단 조성계획 확정
ICT·디스플레이부터 첨단방산까지
한국 역사 ‘독특한 산업계보’ 자랑
박정희 산업정책이 만든 초기구조
지역 산업의 경로 규정한 대표 사례

1960년대 후반,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지향형 공업화 정책을 본격 추진하던 시기였다. 경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에서 중화학·전자 산업 육성으로 산업 전환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는 전자·정밀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했고, 이를 집중 육성할 모델 산업도시 건설이 필요했다.
박정희 정부는 구미를 국가 산업화 모델 도시로 육성했다. 이를 위해 1969년 「구미국가산업단지(구미1단지) 조성 계획」이 공식 확정되었다.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처음 조성된 이후 반세기 동안, 구미는 전자·정밀 기반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그 결과 구미는 1970~80년대 우리나라 혁신의 가장 모범적인 지역이었으며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지역적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2000년대 이후 구미는 ICT 제조, 디스플레이·부품, 첨단 방위산업(유도무기·레이더·전자전 장비)까지 산업 영역을 확장하며, 한국 산업사에서 독특한 ‘산업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산업적 연속성이 단순히 기업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박정희 시대 산업정책이 만든 초기 구조가 지역 산업의 장기적 경로를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편에서는 전자산업과 구미라는 주제로 전자산업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와 구미 산업단지 조성,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정책과 오늘날 구미 산업구조의 연관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구체적인 내용은 경제산업 편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전자산업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
먼저, 전자산업단지가 왜 구미인가?와 관련해 백영훈 박사가 밝힌 에피소드이다. 정부는 1965년경 대일청구권 자금과 차관이 유입되자 이를 국토 개발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국토 개발 관련 자료와 경험을 지닌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한국생산성본부와 일본경제조사협의회가 공동으로 연구팀을 구성해 ‘한일경제협력의 방향과 그 배경-한일공동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연구의 공업 분야에 참여했던 일본인 과학자 다케이 다이사쿠(武井大策) 박사는 함께 연구를 수행한 한국의 백영훈 박사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앞으로 당신네 나라(한국)가 할 일은 전자산업이다. 장차 방위산업도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정밀무기체계의 시대가 반드시 온다.”
재료공학·전기절연 재료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다케이 박사는 “정밀전자산업을 하려면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공기가 맑아야 한다. 둘째, 맑은 물이 있어야 한다. 한국 토양은 화강암 바윗돌이라 물이 깨끗하다. 셋째, 한국은 세계에서 쇠젓가락을 쓸 줄 아는 유일한 민족이다. 손재주가 안 된다. 미국이나 독일은 손이 커서 더더욱 정밀전자를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백영훈 박사는 이를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왜 컬러 TV 방송이 늦어진 것일까?와 얽힌 에피소드다. 1980년 12월 1일 KBS가 컬러 TV 방송을 시작으로 세계에서 81번째로 텔레비전 컬러 시대를 열었다. 흑백 TV를 보던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컬러 TV는 생산되고 있었다. 1974년 아남전자가 일본 마쓰시타 전기와 합작으로 컬러TV를 만들었으며, 이후 금성사와 삼성전자도 가세했다. 그러나 내수용이 아닌 수출용으로 제조된 TV로 국민들은 컬러 TV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었다. 한국 전자산업의 일등 공신인 김완희 박사는 전자업계 숙원인 컬러TV 방송과 국내 시판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허용을 건의했다. “컬러TV는 흑백TV보다 부품이 3배나 많이 들어갑니다. 컬러TV를 판매하면 국내 전자산업이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컬러TV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김 박사, 내가 가장 듣기 싫어 하는 말이 ‘정부가 잘사는 사람만 위하고 가난한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흑백TV도 못 보는 사람이 많은 데 비싼 컬러TV가 나오면 없는 집안 사람들은 더욱 비참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박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고려해 컬러TV 보급 시기를 조절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박정희 정부는 가전제품을 사치품으로 분류하고 TV의 경우 소비세를 35%나 부과한 것을 김 박사의 건의로 15%로 인하했다. 정부는 당시 개발 도상국이던 한국에서 국민소득이 낮은 계층이 소비재를 과도하게 구매하게 될 경우, 경제적 부담이나 소비 불균형이 사회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정치-경제적 고민이 반영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넓은 부지·맑은 물·원활한 인력 수급
구미, 산업시설 기반 조성에 최적지
1975년 국가산단 수출 1억불 달성
1976년 높이 40m 수출 산업탑 건립
2003년 단일 산단 첫 수출액 200억불
구미전자공고·금오공고서 육성한 인재
지역 전자·ICT·부품기업의 핵심 역할
국가산업화 헌신 ‘산업전사’라 불려
◇구미 산업단지 조성
구미산업단지는 교통이 편리하고 넓은 부지, 맑은 물, 원활한 인력 수급등을 갖춘 지역에 조성되어야 했다. 구미는 낙동강 변이 대부분 넓은 평야로 되어 있어 산업시설 기반이 조성되기에 좋은 환경이다. 또한 대구·김천 등과 인접해 노동력이 풍부하고,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계획·건설되면서 수도권 접근성도 확보되어 전자공업단지로 최적지로 평가되었다. 특히 낙동강에서 끌어오는 일일 12만 톤의 공업용수 공급시설과 8만 kW 전력 공급이 가능한 변전소가 갖춰져 있었다.
1968년 박정희 정부가 수출지향형 공업화 정책을 수립하면서 전자정밀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했고, 이 과정에서 구미가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1단지 계획이 공식적으로 수립됐다.
구미국가산업단지(구미공단)는 전자반도체 산업 중점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산업단지로 섬유, 전자 산업 중심의 1단지와 반도체, 전자산업 중심의 2~4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 전문단지를 조성하여 수출 4억 달러를 달성하자는 강한 의지라 바탕이 되어 1969년 구미공업단지 제1단지가 지정되었다. 1970년 초 삼성전자가 TV·무선기기 생산라인을 구미에 입지했고, 1973년에는 금성사(LG전자)가 전자제품 생산라인을 조성되면서 구미국가산업단지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1975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자, 1976년 7월에 높이 40m의 수출 산업의 탑이 건립되었다. 1971년 824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은 1973년 1979년부터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4% 이상을 담당했다. 1980년대에는 종업원 4만여 명, 200개 이상의 업체가 입주한 전자공업단지로 성장했으며, 1990년대에는 백색가전, 전기전자, 그리고 2000년대에는 IT, 모바일 산업으로 주력산업이 변화했다. 2003년에는 국내 단일 산단 최초로 수출액이 2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 이후 삼성·LG전자 등 핵심 기업과 연계 기업들의 지역 외 이전, 초기 입주 기업 및 기반시설의 노후화로 인한 생산성 저하 등 여러 구조적 문제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산단은 꾸준히 수출을 이어가 2023년 수출 25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전자산업 육성을 위한 인력 양성
구미의 공업고와 공과대학 설립은 우연이 아니라, 박정희 시대 산업화 전략의 핵심 구성요소였다. 구미가 ‘전자·정밀 산업도시’로 지정되면서, 국가와 기업은 그 산업을 떠받칠 기능공·기술자·엔지니어의 지역 내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정부는 화학공업 및 방위산업이 필요로 하는 고급 기술인력 공급을 위해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는 기술자·엔지니어·숙련공에게 병역의무 면제 특례를 부여했다. 1973년 이후 이 제도가 시행되자 많은 남학생들이 기술고등학교(공고)에 진학했다. 이들은 병역 면제와 함께 장학금, 등록금 면제, 저렴한 기숙사 제공 등의 혜택을 받으며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에 필요한 실무 기술을 습득했다. 졸업 후 기술자격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중화학 공장에 배치되어, 군복무 대신 국가 산업화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산업전사’, 혹은 ‘특례병이라 불렀다.
1969년부터 조성된 구미국가산업단지는 전자·통신 중심의 국가 전략산업단지였고, 삼성·금성(LG) 등 대기업이 집중 입주하면서 전자·통신 분야 고급 기술인력 부족이 곧바로 문제로 떠올랐다. 지역 산업(구미공단)의 급성장을 뒷받침할 전문 엔지니어 공급 기반이 절실했다.
금오공업고등학교는 산업단지 운영에 필요한 기계·전기·전자 기능공 양성을 담당했고,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구미전자공고)는 구미 산업단지의 전자·ICT·부품 기업 인력 공급의 핵심 축이 되었으며, 금오공대는 ‘공단의 엔지니어 공급 기지와 지역 기술혁신 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구미와 가장 가까운 거점 국립대인 경북대학교가 전자·정보 분야 고급 인력 양성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는 1968년에 설립되었고, 1972년 석사과정, 1977년에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 이는 국가 전략산업(전자·통신)의 성장과 대구·경북 지역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정책과 오늘날 구미 산업구조의 연관성
구미의 현재 산업구조는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과 거의 직결되어 있다. 당시의 산업 기반이 오늘날의 첨단·방산 산업으로 이어져 ‘산업 계보’를 형성한다. 초기 전자산업은 ICT 산업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먼저, 박정희 정부는 구미를 전자정밀 산업도시로 육성하려는 정책적 방향을 설정했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 구미는 통신장비, 스마트기기, 전자부품, 디스플레이, 베터리 부품, 로봇전자 등 ICT 제조 중심 도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전자 중심 산업 구조는 박정희 시대에 마련된 기반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결과다.
둘째, 전자·정밀 기술 기반이 시간이 흐르면서 방위산업(미사일·정찰·전자전)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현재 구미는 LIG넥스원(미사일·레이더·유도무기), 한화시스템(전자전, 레이더, 위성) 등 방산 전자 시스템 기업이 집중되어 있다. 이는 박정희 시대에 구축된 전자기술 인프라와 제조 역량이 방산 기술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이다. ‘천궁-II’, 각종 전자전 장비와 레이더 같은 첨단 방산 제품도 이러한 기술적 연속성 속에서 탄생했다.
셋째, 국가 주도로 조성된 계획형 산업도시는 시간이 지나며 R&D·시험·인증 인프라가 집적되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박정희 시기에 형성된 산업단지 기반과 도시 계획적 구조는 오늘날 국방기술 시험장, 무인기·감시장비 테스트베드, K-방산 클러스터 등 새로운 첨단 산업 인프라의 확장에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계획형 산업도시’라는 구조적 자산이 산업 재편과 고도화를 용이하게 만든 것이다.
넷째, 과거 대기업 중심이었던 산업구조는 점차 대기업과 중소벤처 기업이 공존하는 생태계로 진화했다. 박정희 시대 삼성·LG의 진출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업기반은 이후 1300여 개의 전자방산 중소기업과 100여 개 이상의 벤처기업으로 이어지며 산업 폭을 넓혔다. 그럼에도 중심축은 여전히 전기·전자·정밀 기술 기반의 고부가가치 제조업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과거 정책과의 연속성이 유진된다.
다섯째, 구미는 여전히 수출 중심 산업 도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나, 수출 품목은 시대 흐름에 맞춰 고기술 중심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과거 TV·휴대폰·무선기기 등 전자제품이 수출을 이끌었다면, 오늘날에는 첨단 방산품(천궁-II 등), FPGA, 전자광학 장비, 디지털 통신·레이더, 배터리·신소재 등이 주력 품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출 도시라는 성격은 유지되면서, 품목만 고도화된 것이다.
◇맺는말
박정희 시대 전자산업 육성전략은 구미를 전자·정밀 중심의 계획형 공업도시로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었다. 이는 구미가 한국 전자산업의 핵심 생산기지로 자리 잡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대기업 중심·수출 중심 정책은 구미 내 전자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하며 산업 생태계를 조기에 정착시켰다. 삼성과 LG의 구미 입지는 지역 산업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 사건이었다. 또한 전자공업 진흥법과 국가 인프라 투자는 구미에 제도적·물적 기반을 집중적으로 공급하여 산업의 안정적 성장 환경을 구축했다. 이러한 정책적·제도적·산업적 기반은 구미 산업구조에 강력한 경로의존성을 부여했다. 그 결과 구미는 반세기 동안 전자 → ICT → 방산전자 → 첨단소재·정밀 부품 산업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산업 계보를 형성했다.
구미는 박정희 시대 정책 결정이 지역산업 구조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형성·제약·확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지역 산업 변화는 기업의 전략뿐 아니라 초기 정책적 구조가 결정하는 장기적 경로를 따른다는 점을 구미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