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목록 ( 총 : 53건)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대구, 군위군 편입으로 100년 먹거리 담을 그릇 챙겨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대구, 군위군 편입으로 100년 먹거리 담을 그릇 챙겨

    ◇미래 100년 먹거리를 담을 군위군군위군의 물길은 위천(威川)이 중앙을 관통하고, 최동단 삼국유사면(고로면) 학암리에서 발원하여 소보면(召保面) 사리리를 지나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천에 합류하고, 상주시 중동면에서 낙동강과 다시 합쳐진다. 위천 지류인 남천은 팔공산에 발원하여 부계면, 효령면을 지나 병수리에서 위천과 합류한다. 물길은 흐르는 곳마다 농경지를 형성하였고, 사질양토로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을 만들었다.군위군의 인구변동추이는 1949년 7만544명에서 1955년 6만6천432명으로 줄었다가,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후학 양성은 문중 발전 도모하는 학문유산 계승작업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후학 양성은 문중 발전 도모하는 학문유산 계승작업

    ◇삶이란 배움이고, 배움이 삶이다(生卽學, 學卽生)오늘날의 배움은 제도적인 교육기관을 통해 ‘형식지(形式知, explicit knowledge)’를 학습하는 공식적 학습(公式的 學習, formal learning)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인 특수경험, 노하우, 비기 등의 비형식적인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는 비공식적 학습(非公式的 學習, informal learning) 혹은 자기주도학습(自己主導學習, self-directed learnig)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오늘날 인적자원개발이란 변혁을 초래함에는 조지 엘튼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서 217회 언급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서 217회 언급

    ◇도동서원에서 올곧음을 찾아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서흥김씨(瑞興金氏)로 1454년 오늘날 서울 정릉에서 중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金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선산(善山)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소학을 익혔고, 소학에 심취해서 언필칭소학이라고 해서 ‘소학동자(小學童子)’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삼십세(立志)에 비로소 육경을 섭렵하였고, 1480(성종11)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유생으로 원각사 승려의 불법을 들어 척불숭유(斥佛崇儒)를 상소했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오늘날 ‘도서’ ‘도서관’이란 용어는 ‘하도낙서’에 연유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오늘날 ‘도서’ ‘도서관’이란 용어는 ‘하도낙서’에 연유

    ◇낙빈서원과 금암서당낙빈서원(洛濱書院)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사육신을 모시고자 1679(숙종5)년에 세운 ‘하빈사(河濱祠)’에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을 배향하였다. 1694(숙종20)년에 ‘낙빈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순천박씨 박팽년(朴彭年)의 후손들이 묘골(묘리)에 세거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박팽년은 조선왕조실록에 178번이나 나오는 역사적 인물로 세종실록에 18번, 문종실록,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지역 선비들, 서녘호수에 애정 갖고 ‘서호’라 불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지역 선비들, 서녘호수에 애정 갖고 ‘서호’라 불러

    ◇달구벌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마련했던 배움터금호 물길을 하나의 용으로 비유하면 금호잠용이라고 표현한다. 머리는 와룡산에 두고, 사족은 신천, 동화천, 달서천 그리고 팔거천이 된다. 그러나 금호잠용을 형성하도록 물길을 만들어주는 분수령으로 팔공산과 비슬산은 물론이고, 동촌 아양루가 위치한 구룡산, 서구 와룡산, 달서구 청룡산과 황룡산이 물길을 마련하고 있다. ‘용의 언덕(Hills of Dragon)’을 뜻하는 용구(龍丘, hill of dragon), 용잠(龍岑, ridge of dragon), 혹은 용강(龍岡, cliff of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독립투사 양성하던 구천서당, 택지개발에 ‘철거 위기’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독립투사 양성하던 구천서당, 택지개발에 ‘철거 위기’

    ◇훼손되는 도남정사(道南精舍)우국지사가 아니더라도 운양호사건(1875), 제물포조약(1880), 을미사건(1895) 등 연이어 떨어지는 걸 보고, 일제가 강제점령을 위해 전초작업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봤던 영남선비들은 자주자강 혹은 각자도생 차원에서 교학상장을 위한 배움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도덕산 아래(國憂洞) 솥골(鼎谷)마을에 전주최씨의 진사 최치상(崔致翔, 1831~1886)을 향배하는 재실로 1899년 손자 최해운이 도남정사를 세웠다. 최해운은 1924년 5월 김창숙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돕고 있던 손후익(孫厚翼)을 만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향교·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 열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향교·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 열어

    ◇배움터는 따로 없이 언제 어디서나!1551(명종6)년 51세 퇴계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우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인가? 시골에서 배우던 서울에서 배우던 오직 뜻을 이루는 것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썼다.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금호 동쪽 물섶에 옹기종기 모였던 집성촌에선 향교나 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를 열었다. 서당, 정사, 당 혹은 재실 등에서 문중이 모여서 묘산(廟算)을 기획하고 서로 교학상장을 도모했다. 오늘날 동구에서 향학열이 가장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특히 경주최씨의 배움터로는 도동 구회당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3년, 동구 지묘동에 대구 첫 ‘사액서원’ 들어서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3년, 동구 지묘동에 대구 첫 ‘사액서원’ 들어서다

    ◇동명이인 서침구계선생(龜溪先生)에 대한 세종실록을 검색하면, 세종8년 12월 24일자에서 시작해 세종19년 4월 19일까지 7회나 나오고 있으며, 마지막 기록은 “사헌부에서 서침(徐沈)을 처벌해주시길 세종국왕에게 계청하고 윤허를 기다렸으나 거절했다.” 그 내용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서침(徐沈)이 첫봄 월록(月祿, 오늘날 월급)을 받지 않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갔는데, 의정부에선 고령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에 적당하지 않으니 파직시키라는 계청(啓請)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어떤 죄도 되지 않는다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길 중심으로 집성촌…생명체의 공통적 필수 요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길 중심으로 집성촌…생명체의 공통적 필수 요건

    ◇3W(Water, Way & Will)에 따라 집성촌이 형성달구벌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모여들었던 곳은 신천변이다. 신라시대 삽량주의 수창군에서 고려시대 수성군으로 달구벌이 행정중심지가 됐다. 조선시대 1419(세종1)년에 대구군으로 승격, 그리고 1466(세조12)년에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되어 행정중심지가 이동됐다. 이전에는 신천을 중심으로 달구벌의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구석기시대를 이끌어 왔다. 이렇게 물길(water)을 중심으로 집성촌이 형성되는 건 생명수를 요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필수요건이었다.다음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배산임수’ 택리 기준 따라 산기슭 아래 집성촌 형성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배산임수’ 택리 기준 따라 산기슭 아래 집성촌 형성

    ◇금호강 섶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집성촌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씨 통계자료를 공식적으로 간행한 건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를 시발점으로 1481년 동국여지승람,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있다.‘배산임수’의 택리 기준에 따라 팔공산, 비슬산 등 산기슭 아래에 금호강 혹은 신천 물섶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대구의 집성현상을: i) 경주도호부 대구군, 수성현 및 하빈현(달성군 다사하빈), 해안현, 현풍현과 ii) 성주목의 화원현, 팔거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세종실록지리지를 기준으로 민가호수와 인구수를 짐작해보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고려가 후삼국 통일하자 중국식 성씨제도 전국에 반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고려가 후삼국 통일하자 중국식 성씨제도 전국에 반포

    ◇유교 신분제(桎梏)의 탈피수단인 위보(僞譜)고려 태조는 사성제(賜姓制)와 본관단성제(本貫單姓制)까지 했으며, 고려사 기록에 보면 1055(문종9)년까지 귀족층에서도 대부분 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과거에서 성씨 없이는 합격시키지 않는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 Sealed Envelop System)는 고려사(高麗史)에 의거하면, 1011(현종2)년부터 시행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식 단성과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대주의에 입각한 중국 인물을 차용해 시조(始祖)로 족보를 만들었다. 사실 대부분은 중국기록과 무관했다. 요나라와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姓은 장소를 기준으로…氏는 자손들을 구분하는 것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姓은 장소를 기준으로…氏는 자손들을 구분하는 것

    금호 하빈(河濱)은 조선 초까지 ‘사빈(泗濱, 오늘날 사수동과 하빈면)’이었으나, 1640년 칠곡도호부가 설립되고 난 뒤 문주방(文朱方) 사수리(泗水里)로, 1895년 칠곡군 문주면 사수리로, 1982년에 칠곡2동 사수리에서 2001년 3월 1일부터 행정명 관문동(關門洞), 법정동 사수동(泗水洞)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에 1617(광해군9)년에 한강(寒岡) 정구 선생이 75세 고령에 그해 2월 ‘사빈서재(泗濱書齋)’강학당을 열었다. 1618년 6월까지 1년 4개월간 제자 손처눌(孫處訥, 1553~1634), 이윤우(李潤雨, 1569~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조선 선비, 대자연 속 섭리 터득 위해 관어대 세워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조선 선비, 대자연 속 섭리 터득 위해 관어대 세워

    ◇물고기가 뛰어노는 모습에 그만 넋을 놓았다네(觀魚之樂)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관어대(觀魚臺)가 여러 곳에 있었다. 경상북도에 현존하는 관어대만 해도 영덕(영해 괴시2리) 상대산 관어대, 의성 안계면 교촌리 관어대 및 예천 보문면 간방리 관어대가 있다. 이외에도 기억나는 곳으로는 강원도 정선 관어대, 대구 북구 사수동의 관어대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관어대로는 영덕 혹은 영해 상대산(上臺山) 관어대라고 한다.왜냐?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한 분이신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쓰신 ‘관어대소부(觀魚臺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폭포 물 쏟아지자 골짜기는 모두를 귀머거리 만들었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폭포 물 쏟아지자 골짜기는 모두를 귀머거리 만들었네”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源) 선생이 사셨던 백불고택(百弗古宅)이 있다. 이곳은 지난 영조41(1765, 乙酉)년에 중용(中庸)의 한 구절 “온갖 것 다 알고자 하지도 말고, 온갖 일 다 하겠다고 하지도 말라(百弗知, 百弗能)”라는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의 말씀 한 구절에서 백불암(百弗庵)이라는 편액을 만들어 걸었고, 자신의 호를 백불암(百弗庵)이라고도 했다.백불(百弗)이란 오늘날 젊은이들은 100$(달러)로 알겠지만 “백 가지 다하겠다고 행동하지 말라(百弗行)”라는 뜻이다. 필자도 이를 알고부터 “하나라도 똑 부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선인들은 우순풍조로 가뭄·홍수 없는 풍년 기원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선인들은 우순풍조로 가뭄·홍수 없는 풍년 기원

    ◇금호세심정(琴湖洗心亭)에서 마음 씻기(mind washing, 洗心)를동화천 섶 동변동 유니버시아드 선수촌 아파트에서 가람봉 들머리에는 “마을을 씻어주는 정자(洗心亭)”가 자리 잡았던 옛터가 있다. 세심(洗心) 전응창(全應昌) 선생이 세운정자라 그의 호를 따서 세심정(洗心亭)이라고 했다. 세심 선생의 형,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은 대구 최초서원인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아들 이숙량(李叔樑)과 영남유림의 쌍두마차였다. 연경서원을 들락거렸던 영남유림들과 금호강 선유와 세심정 풍류를 즐겼다. 세심을 통해 요산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세속의 근심·걱정 깨끗이 씻어주는 ‘대구의 월든’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세속의 근심·걱정 깨끗이 씻어주는 ‘대구의 월든’

    ◇꽃섬(花洲)은 금호잠용의 심장(琴湖潛龍之心臟)함지산에서 동화천, 신천, 팔거천, 달서천이란 4개 지천을 사지(四肢)로 생각하면, 금호란 거대한 잠룡이 그려진다. 옛 선인들은 그런 모습을 금호잠용(琴湖潛龍)이라고 했다. 이에 연유하여 칠곡이나 지천에서 보면 금호강섶에서 햇살을 받아서 졸고 있는 금호잠용을 와룡산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아양루와 통천사가 있는 금호수변 서벽산(西壁山)을 9마리 용이 우글거리는형상에 구룡산(九龍山)이라 했다. 그렇다면 과거 하중도 혹은 섬들(扇狀地)은 강심(江心)에 있기에 ‘금호의 심장(琴湖之心)’이었다.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초가을 코스모스가 만개하면 요정들이 모여드는 곳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초가을 코스모스가 만개하면 요정들이 모여드는 곳

    ◇금호 꽃섬(琴湖花洲), 꽃의 왕국 아닌 ‘요정의 나라’‘금호꽃섬’을 노곡 주민들은 ‘섬들(島野)’ 혹은 ‘무섬(물섬)’이라고 했다. 일제 행정용어로는 하중도(河中島)였다. 졸졸거리는 물소리에 갈대까지 노래하는 금호에 어울리지 않는 삭막한 표현이었다. 일제의 하중도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고자 지난 2021년 9월 시민공모를 통해 ‘금호 꽃섬’이라는 예쁜 이름을 찾아 달았다. 봄 유채꽃, 초가을 코스모스가 만개하면 지상에 모든 꽃요정(花精)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자연스러울 뿐이다.꽃 요정(flower elf)이 살고 있다는 증거로는 첫째는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검단동 ‘소유정’ 소재로 즉석 창가…투박한 예술성 돋보이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검단동 ‘소유정’ 소재로 즉석 창가…투박한 예술성 돋보이네

    ◇면앙정가는 알고, 소유정가는 몰라2022년도 ‘메가스타디(Mega-Study)’에서 대입 수능시험 특히 국어 고전 분야에서 송순(宋純, 1493 ~ 1582)의 ‘면앙정가’가 출제범위 40위이고 출제확률 39%라고 발표했다. 다시 말하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그런데 교육수도를 자랑하는 대구시민이, 검단동에 있는‘소유정(小有亭)’을 소재로 하는 ‘소유정가’라는 가사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 문화도시 대구시민의 현주소다. 중국고대 한시를 달통하신 전문가조차도 ‘소유정가’는 초면이다. 왜냐고? 시험에 나오지 않았으니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1년에 심은 회화나무, 선비의 위엄스런 풍채 간직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1년에 심은 회화나무, 선비의 위엄스런 풍채 간직

    ◇대구에 남아 있는 회화나무회화나무의 쓰임새에 대해서 고전 의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 혹은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을 살펴보기보다 먼저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걸 보면, i) 꽃(槐花, 槐米)과 열매(槐角)는 달려서 황색염료로, ii) 약제로는 어린 꽃을 풍치(風齒)에, 열매는 은행(銀杏)처럼 살충제, 지혈제 및 항습진에 사용해왔다. iii) 나무 전체가 류틴(rutin)과 베툴린(Betulin)이라는 파이토 케미컬(phyto-chemical)이 있어 지혈(止血), 고혈압, 뇌일혈(腦溢血) 치료에 추출물이 사용된다. iv) 조선 선

  •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회화나무 아래서 갑론을박 하는 ‘나무 그림자 학문’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회화나무 아래서 갑론을박 하는 ‘나무 그림자 학문’

    ◇구룡이 핥아 아양루를 목욕시키니, 아양루 해·달을 토해 내네통천사 일주문의 사천왕 앞 주련엔 “달빛 비취는 온 세상은 고요하기만 한데, 마음이 고요하게 지더니 온갖 인연들이 홀가분하다네. 홀로 다소곳이 앉아 향불을 사르자니, 황금으로 새겨진 법문을 암송하면서 그리(설법대로) 살렵니다(月照諸品靜, 心持萬緣輕. 知機心自閒, 獨坐一爐香, 金文誦兩行).”라는 법문이 적혀있다. 이런 주련은 전북 순창군 광덕산 강천사 심우당에서도, 밀양군 재약산 표충사 심우당 주련에서도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본당 앞 석명법문엔 “삼십 년 동안 이왕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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