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날마다 백성을 좌수영 뜰로 불러들인 까닭은…
이순신이 날마다 백성을 좌수영 뜰로 불러들인 까닭은…
  • 이대영
  • 승인 2019.10.23 20: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80년 전남 고흥 발포만호 임명
인근 백성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두터운 친분관계 유지에 노력
수군에 필요한 각종 정보 얻어
틈만 나면 공예장인들 모아놓고
공예품 만들어 조정 대신들에 선물
받은 답례는 반드시 장인에 전달
감동받은 백성들 서로 노역 자처
전쟁땐 지원병·군수품 지원 줄이어

 

이대영의 신대구 택리지 - (41)神은 언제나 디테일 속에 숨어있다

선조는 내심 안심할 수 없었다. 1591년 2월 어느 날 비변사(備邊司)를 찾아 “다가올 대전란을 극복할 깜냥이 되는 장수를 발굴해 대비하라(爲大國亂, 求將材備了)”고 하명했다.

이조판서 유성룡(柳成龍)은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좌수영(정3품)에 천거했다. 이는 오늘날 용어로는 낙하산 인사였다. 당시 용어로는 불차탁용(不次擢用) 혹은 발탁(拔擢)이라고 했다.

사실 3년 전 1589년에 이산해(李山海, 1539∼1609)와 정언신(鄭彦信, 1527∼1591)이 불차탁용(不次擢用) 되었고, 이산해와 정언신이 이순신의 추천서 서두에 서명까지 했기에 인사태풍은 ‘찻잔 속 태풍’도 되지 않았다. 정읍현감(종6품)→진도군수(정5품)→가리포 첨사(종3품)→전라좌수영(정3품)으로 자리를 옮긴 영예가 있었다. 하지만 모함을 받아 영광이 사라지자, 이순신에겐 선조의 친국(親鞫)과 문초(問招)가 27일간 지속되었고, 2번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굴욕으로 나가떨어졌다.

1597년 3월 13일 선조는 투옥된 이순신에게 대역죄로 죽음 밖에 없다며, i) 부산 왜군진영 화재사건을 국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국왕을 무시한 죄부터, ii)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잡으라는 어명을 어긴 죄, iii) 원균을 시기하고 전공까지 낚아챈 죄 등을 제시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신하로 임금을 기만했으나 반드시 죽을 것이니 고문을 가해 실상을 캐라”고 고함쳤다. 그때 이순신은 자포자기로 실성한 상태였다. 선조는 조정대신들에게도 “삼대삼족뿐만 아니라 구족을 멸할 것이니. 구명은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결국 하늘을 찔렀던 선조의 자존심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백의종군으로 이순신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이 그 자리를 인수받았다.

원균은 3월 24일에 “3월 9일 거제 앞바다에서 적선 3척을 격파, 왜병 수급 47명을 획득했다”는 승첩장계(勝捷狀啓)를 선조에게 상신했다. 선조는 “원균이 명을 받자마자 무용을 드려냈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측근에게 당장 포상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오후, 부친의 죽음에도 군영을 떠나지 않았던 우국충정의 장수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 1564~1624)의 장계가 올라왔다.

“원균 측의 왜병 수급 47급은 사실인 즉, 왜군에 잡힌 조선백성 47명이고, 그들은 거제도 벌목을 가겠다고 해서 윤허했습니다. 그런데 원균 측에서 유인해 수급으로 배어 승첩장계와 같이 상신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자충수에 멍하니 한 동안 하늘만 쳐다봤다. 끝내 “순신아, 내가 너를 아무리 미워한들 다른 자들은 이 전쟁을 극복할 깜냥이 안 돼, 그래서 네게 백의종군을 당부한다(臣呼雖惡爾, 庶此亂不勘, 故下要白衣)”는 교지에다가 수결(手決)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 옥문이 열렸고, 이순신(李舜臣)은 27일 만에 신천지를 봤다. 어릴 때 자신의 집에서 사내종으로 있었던 윤간(尹侃)을 찾아가니 조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소식을 듣고 회포를 풀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윤자신(尹自新)과 이순신(李純臣, 1554~1611)이 술을 챙겨왔다. 유성룡(柳成龍), 정탁(鄭琢), 심희수(沈禧壽) 등이 직간접으로 문안을 했다. 살아있으니 술까지 주거니 받거니 했다.

4월 13일 그는 그립던 어머니를 만날 꿈에 부풀었으나 동네입구 바닷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하늘마저 캄캄했다.(天也黑黑)”

어머니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도원수부(都元帥府)로 길을 떠나야 했다. “차라리 죽어 어머니와 두형을 뵙고 싶었다(寧我願亡, 得見母兄).”고. 이렇게 6월 4일에 도원수부(都元帥府)에 도착했으며, 8월 3일에 진주 수곡(水谷)에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제수(除授)를 받았다.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草溪)에 있는 도원수 본영에서 백의종군으로 병영생활을 마친 뒤 8월 3일에 비로소 여수좌수영에 도착하자마자 현황파악에 들어갔다. 군영에 남아있는 병졸이라고는 도망가지 못한 부상병뿐이다. 전투장비라고는 왜병들의 방화에 불타다 남은 배 12척뿐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수군(水軍)을 폐지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지휘를 받으라는 하명(下命)의 교지가 당도했다.

“나는 이왕에 죽었던 사람이니 빼더라도, 도탄에서 허덕이는 순진하기만 한 무지렁이 백성들이 눈에 밟혔다. 국왕은 나라의 앞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이라도 하시는지...”라는 답답함에 이순신은 붓을 들어 국왕을 직접 설득하기로 했다.

1597년 9월이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수군이 너무 적어서 왜군을 막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육군에 참가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5~6년 동안만이라도 수군이 있었기에 왜적들이 호남을 감히 직접 휩쓸지는 못한 건 수군이 길목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 이순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으니(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 힘을 다해 왜적에게 항전한다면 가히 막아낼 것 같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수군폐지는 왜적에게는 행운을 안겨다 줘 호남을 휩쓸고 한강 물을 이용해 한성(漢城)을 진공할 길목을 열어 주는 것이 될까 이를 두려워합니다. 가진 전선이 비록 작다고 한들 미력하지만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적을 막겠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왜적도 감히 능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 평소 친분관계가 전시의 운명을 갈라

이순신은 1580년 9월 36세 나이로 전라도 고흥의 발포만호(鉢浦萬戶)에 임명되어 수군생활을 했다. 1년 5개월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인접 포구에 거주하는 백성을 날마다 좌수영 뜰로 불러들여 그들과 밤새 대화를 나눴다. 남자들은 짚신, 여자는 길쌈을 하는 등 각자 자유롭게 생업을 하면서 허물없이 속마음까지 털어놓거나 농담도 오갔다. 대부분이 어부(漁夫)들이었기에 이들을 통해 물때는 언제이고, 어떤 곳엔 소용돌이가 쳐 배를 뒤집으며, 어느 여울에 암초로 배가 부서진다는 수군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어영담(魚泳潭, 1532~1596)은 해상정보에 해박했다. 나중에 그를 수로향도(水路嚮導) 장수로 특채했다.

수군을 통제하면서 틈만 나면 전통공예장인들을 모아놓고, 부채, 붓, 죽부인 등의 공예품을 만들게 해서 조정대신들은 물론 친지들에게 철따라 친필서한을 동봉해 선물로 문안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장군을 두고 새우로 고래를 잡는(以蝦捕鯨) 수완으로 수군중흥(水軍中興)까지 했다고 치하했다. 답례나 회신을 받으면 반드시 만든 장인(匠人)에게 전달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노역에 참여하려고 문전성시였다. 이렇게 평소 친분관계를 쌓아놓자 전쟁 때는 지원병과 군수품 지원이 줄을 이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인정머리란 신은 디테일에 숨어있다(God is in the detail).”

1598(戊戌)년 7월 18일 왜선 100여 척이 고흥 녹도(鹿島)에 침입했다. 이순신과 명제독(明提督) 진린(陳璘)이 함께 금당도(金塘島)로 출동하자 왜선 척후선(斥候船) 2척이 왔다가 도주했다.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1553∼1609)에게 8척을 내줘 절이도(折爾島)에 매복시켰다. 진린(陳璘,1543~1607)은 30척으로 수비하도록 지시를 했다. 24일 송여종은 왜척 3척을 포획하고 왜수군 70명의 목을 베어 수급(首級)을 갖고 왔다. 명장 진린은 평소 위세와는 딴판이 되었다. 화풀이로 부하병졸을 박살내고 있었다. 이를 본 이순신은 그에게 “아군의 승첩이 아니라, 천병(天兵)의 위호덕분(衛護德分)이기에 수급을 다 드리겠으니. 황조(皇朝)에 승첩장계를 상신하시지요?”라며 전공을 그에게 돌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송여종 장군은 이순신에게 실망해 했다. 이순신은 송장군의 손을 꼭 잡고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왜적의 썩은 머리가 어찌 아깝겠는가?”하면서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