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잘해야죠…힘이 생길 때까지”
[기자수첩] “잘해야죠…힘이 생길 때까지”
  • 승인 2023.09.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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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수_고령지역기자
이채수 사회2부 부장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로 한창 기쁨에 들떠 있던 지난 17일 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알파이살리아 호텔 앞. 등재 축하만찬과 교민 축하자리 등 떠들썩하고 흥분됐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고령군 등재추진단 일행이 탄 차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밤기온 마저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대 사막지역이지만 차안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동행취재에 나섰던 기자도 침묵의 원인을 알기에 그냥 침묵에 동조했다.

인구 3만의 소도시 고령군은 그동안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만이 국내외에 가야의 정체성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판단으로 전 군민이 똘똘 뭉쳤다.

지난 2013년 고령군이 세계유산 등재에 가장 먼저 나섰지만 전 정부시절 인근 시군도 같이 하라는 권고로 이에 인근의 7곳의 도시가 연속유산으로 공동등재에 나섰다.

‘벌써 됐어도 됐어야할 등재’가 정치논리와 힘의 논리로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는 바람에 등재일정은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에는 러-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의장국이 러시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바뀌면서 1년을 허비했다.

고령군은 그래도 “많은 지자체가 참가하면 ‘판’도 커지지 않겠느냐”는 긍정적인 사고로 모두 받아들였다. 고령 대가야가 후기가야를 이끈 명분 만은 존재하고 모두가 인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를 앞두고 등재 당일 입을 가야복식을 준비하고 가야 면류관, 선물용 가야금을 들고 정성에 정성을 더해 리야드로 향했다.

인기는 최고였다. 가야복식을 한 이남철 군수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회의장에 참석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의 사진 촬영 요구가 끊이질 않았다.

히잡을 쓴 한 사우디 여성은 “코리아의 K-팝과 K-푸드를 좋아하는데 이런 오랜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겠냐”며 연신 엄지를 치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등재 후 상황이 급변했다.

후기가야 맹주이자 가야문명을 이끈 고령은 전체 유산면적 44%, 신청서에 등재된 고분군 기수도 57%를 차지해 모든 지자체를 압도한다.

그런데 갑자기 한 지자체가 공식 만찬석상에서 자기들이 주도해 등재선포식을 갖는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경북도와 사전협의가 전혀 없는 일방적인 발언이었다.

말 그대로 가야문명의 중심지를 자기지역으로 가져가겠다는 발상이다. 가야국립박물관 등 가야와 관련한 기관이 많이 존재한다는 이유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나서 급하게 말렸지만 이들의 볼썽사나운 ‘땡깡’은 한동안 계속됐다. 결국 이철우 지사가 ‘우리끼리 등재선포식을 갖자’는 선에서 일단 상황은 정리됐다.

비운의 왕국이었던 고령 대가야가 세계유산 등재라는 호재를 맞고도 타 지역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남철 고령군수가 남긴 여운의 말이 귀에 맴돈다.

“잘해내야죠. 세계유산 등재로 이제 신라,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4국체제로 인정 받았으니 잘키워 나가야죠. 힘이 생길 때까지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이채수 csle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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