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숙 시인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와 나뭇잎들이 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떠안고 있다. 앞으로 달려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붉은 신호등 앞에 선 듯 홀로 정지된 느낌이다. 이다음에 켜든 녹색 신호등의 불빛 따라 건너가면 그만인 걸 떨어져 내린 곳이 하필 거미줄이라니, 생각이 깊어지는 십일월의 끝자락, 거미줄에 걸린 나뭇잎처럼 매달려 있다.

거리마다 뿌리에서 벗어난 은행나무 노란 잎들이 만장처럼 흩날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끈 떨어진 연처럼 갈팡질팡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서성이는 이파리들의 군무 속으로 왠지 모를 고적감이 베인다. 흡사 우리들 모습과 닮아있다. 어디를 향해 좇고 있는지 무엇을 구하고자 함인지 알 순 없지만, 평소와는 다른 풍경과 타인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주변을 자주 기웃거리거나 내 안에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여름 골목 안 끝 집이었던 우리 집 감나무에 태풍 ‘개미’가 지나간 때의 일이 떠오른다. 해거리를 견디는 동안 처음부터 제자리를 지키던 것과 새로 생겨난 것들 사이에 곁가지가 돋아나면서 틈이 생겼다. 서로 어우러지지 못한 채 움푹 팬 곳이 썩고 있을 즈음 밤새 내린 집중호우에 수십 년간 지나온 계절 거뜬히 버텨오던 나무의 반쪽이 그만 툭 부러지고 말았다.

채 익기도 전, 내동댕이쳐진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어린 감들과 덜 여문 풋감들이 마저 단단하게 여물기 위해선 몇 날을 더 기다려야 했건만.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 문을 코앞에 두고 그만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퇴비도 못되고 소각도 안 되는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래야 겨우 쓰레기봉투 속이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까치밥 한 그릇만큼이라도 되기 위한 꿈을 키워가던 감들이 그저 측은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감나무 아래 서서 ‘어린 감들 모두 어디로 가나’ 애태우며 종종걸음이던 나를 향해 그가 던진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신이 있어 눈여겨보고는 도와준 것일지도 모르지. 한시름 덜었네.’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이 감나무와 닮아있었다.

어찌 먹여 살릴까를 밤낮으로 고심했을 나무엔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단 책임감의 무게로부터 때론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선 자리에 가려 가장의 노고까진 미처 돌아보지 못했구나 싶어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나도 얼굴이 화끈, 붉어졌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는 뜻밖의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듯 사랑하는 일도 사람의 일이라 때로는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어디라도 멀리 떠나거나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떠남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죽어가는 나무에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처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잎사귀들에 가려져 있던 나무의 속내가 그제야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일월부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려온 달력이 십일월에 멈춰 있다. 앞서 달리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끝내 어쩔 수 없이 넘기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본다. 어차피 할 거 미리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막차를 타는 사람도 있듯 십일월의 마지막 저녁,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간 날짜들을 돌아보며 내 방의 달력만은 더는 미루지 않고 넘기기로 한다. 이맘때쯤, 새로 받은 다이어리의 첫 장에 빼놓지 않고 옮겨 적는 임영조 시인의 ‘12월’이라는 시의 전문과 함께 필사적으로. 때로는 거세게, 아니면 담담하게 와 닿는 내 안의 물음을 통해 저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 가늠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 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 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날짜들이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모두 지우며 또 그렇게 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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