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삼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매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홍매화를 특별히 좋아한다. 그래서 매년 2월 말이면 홍매화를 보러 양산 통도사를 부모님 뵈러가듯 간다. 또 보는 것으론 아쉬움과 그리움을 채우지 못했는지 한번은 우리나라 토종 전통 홍매화를 찾으러 진도까지 다녀왔다. 전통 홍매화의 매력만 보고 오려했는데 그곳에서 선조들이 오랫동안 키워온 토종 홍매화의 자태와 향기에 빠져 덜컥 선금까지 주고 계약을 하고 왔다. 나중에 집을 지으면 제일 먼저 데리고 오리라 굳게 마음을 먹으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도 나랑 비슷하게 매화를 좋아하셨는가보다. 기록에 의하면 말년에 단원의 생활이 곤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화를 좋아하셨으면 그림 그려주는 값으로 받은 3천 냥을 매화나무 사는데 2천을 주고, 벗들과 술잔치를 위해 7백량, 나머지 3백 냥으로 땔감과 곡식을 바꿨다고 하니 단원의 매화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그런 감동적인 스토리가 닮긴 단원의 ‘백매도’가 대구간송미술관 상설전시장에 전시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좌고우면 하지 않고 모든 스케쥴을 뒤로 미루고 미술관으로 내달렸다. 책으로만 보았던 원작을 보러가는 기분은 마치 그렇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그리운 이를 만나러가는 기분 그 이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간송의 단원과 혜원의 작품을 보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한 켠에 마련된 단원의 ‘백매도’에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명품의 이름값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최고의 화가가 그린 매화그림에 뭐 특별한 기교를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단원의 ‘백매도’는 정말 소박하리만치 작고 무기교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크지 않은 공간에 딱 한 그루 매화만 그렸을 뿐이다. 그뿐이다. 조금 더 설명을 붙인다면 그림 좌측 상단에 ‘독립격한청효시’라는 화제와 단원이라는 김홍도의 호가 적혀져있으며 주문방인의 이름과 백문방인의 호가 찍인 낙관이 전부다. 그게 끝이다. ‘맑은 새벽녘 추위에 흔들리면서도 홀로 서 있다’라는 화제 글이 이 그림의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다. 화제를 이해하고 그림을 보니 그제서야 그림이 이해되었다. 옅은 청먹으로 배경을 깔고 그 위에 농묵(진한 먹)과 중먹(중간 먹)으로 무심하게 나무의 형태를 잡고 아직 채 피지 않는 봉우리들로만 구성된 매화꽃을 마치 새벽녘의 햇살처럼 똑 떨어지게 그렸다.

보통 매화의 개화 시기는 2월초부터 4월 초까지이다. 추위가 가시기 전에 유일하게 꽃을 피우는 몇 안 되는 꽃이다. 그래서일까? 따뜻한 봄날 꽃을 피우는 수많은 꽃들보다 이 지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꽃을 피우는 매화를 보고 우리 선조들은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들의 고고한 정신을 읽었는지 모른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께서 국가에 기증한 수 많은 작품 중에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들어가 있었다. 흔히 그 작품의 작품가가 500억이라고 한다. 그럼 단원의 ‘백매도’의 작품가는 과연 얼마일까? 진품명품 감정단에게 감정을 받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필자가 매긴 감정가는 대략 700억 선으로 잡았다. 작품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희소성과 작가의 브랜드, 그리고 그 작품의 우수성으로 매겨진다. 즉, 작품의 가격이 그 작품을 그린 작가의 정성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의 경지에서 스스로 태어난 그림이 최고라고 했으니 이 보다 더 똑 떨어지는 그림이 어디에 있겠는가?

梅經寒苦發淸香매경한고발청향(매화는 추운 고통을 겪어야 향기를 내뿜고)

人逢艱難顯氣節인봉간난현기절(사람은 어려움을 만나야 기와 절개가 드러난다)

매화를 설명하는 고사성어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이 깊은 문장을 읽고 단원의 ‘백매도’를 보면 그 매화가 바로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인생이란 걸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래서 더 애뜻하고 더 귀해보인다.

삶에서 시련을 좋아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인생에서 시련은 선택과 유무가 아니다. 우리들 인생에서 필수조건이란 걸 안다면 추운 겨울의 매화처럼 찬바람과 고독을 즐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화중지왕(꽃 중의 꽃)’이 되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도 멋있지 않겠는가?

붉은 홍매 한주와 백매 한주를 볕 좋은 곳에 심어 매년 봄 매화의 향기에 취해야겠다.

김성삼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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