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산 첩첩산중에 자리한 숲
축구장 40개 규모 12만 그루 자라
깊은 산 속 계곡 길을 따라
혼자 걷는 시간 정말 즐거워

사진
눈 내린 영양 자작나무숲 풍경.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할, 사람들의 발길을 더 많이 끌어들이며 사랑을 받을 것이 확실한 자작나무숲이다.

섭씨 25도 정도의 초여름 날씨(대구)가 1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영양 자작나무숲이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할, 사람들의 발길을 더 많이 끌어들이며 사랑을 받을 것이 확실한 자작나무숲이다.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산 속에 있다. 지난 10일 이곳을 다녀왔다. 영양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몇 년 전에 가서 느꼈던 감흥이 생각나서 다시 가보고 싶었다.

죽파리 주차장에서 무료 전기차를 이용하면 자작나무숲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그날은 전기차를 운행하지 않는 월요일이어서 차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걸어가며 계곡 길의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숲을 찾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더 호젓할 것 같았다.

걸어서 1시간 남짓 걸렸는데, 이날 역시 분위기와 풍경이 좋았다. 이날은 기온이 높아 완연한 봄날 같았지만, 그 전에 많이 내린 눈이 별로 녹지 않아서 제설작업을 한 길 말고는 눈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죽파리 마을길을 지나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가는 계곡 길에 들어서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자작나무숲까지는 계곡 하천 옆으로 난 길이 10리 정도 이어진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하늘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계곡이다. 숲이 있는 검마산은 해발 1천m가 넘는 산(1,017m)이다.

제설작업을 한 길 옆에 쌓인 눈을 보니 20~30㎝ 될 듯했다. 계곡과 산 바닥은 하얀 눈 세상이어서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계곡 하천에는 얼음이 남아있었지만, 기온이 높아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얼음 위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물빛이 우리나라 산천에서는 보기 힘든 에메랄드빛이었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알프스 고갯길인 푸르카 패스를 지나면서 곳곳에서 본 호수의 물빛과 같았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다.

짐승의 발자국이 보이기도 눈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대부분 활엽수여서 아직 초록의 잎들은 볼 수 없었지만, 곳곳에 우뚝 선 적송은 눈밭 속에 더욱더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적막하지만 충만한 기운 가득한 계곡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길 옆 곳곳에는 최근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정자와 의자 등 쉼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길은 흙길인데, 차량이 교행할 정도로 넓고 자작나무숲까지 오르막이 거의 없어 누구나 걷기에 별 부담이 없다. 막바지에 약간의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계곡 다리가 보이는, 두 골짜기가 합쳐지는 곳에 이르자 자작나무숲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자작나무숲이 펼쳐진, 아무도 없는 눈 덮인 겨울 빈산이 눈에 들어왔다.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도 희다는 의미. 그러면서 ‘설백자작백천지백’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 민요 사철가에 ‘월백설백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한시 구절은 한 스님과 ‘김삿갓’으로 더 유명한 방랑시인 김병연(1807~1863)의 문답에서 나왔다고 한다. 김병연이 금강산에서 만난 공허 스님과 나눈 시 문답이다.

스님이 먼저 한 구절을 읊자, 김병연이 답했다.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도 하얗습니다(月白雪白天地白).’

‘산 깊고 밤 깊고 객의 근심도 깊습니다( 沈夜深客愁心).’

눈 쌓인 자작나무숲에서 홀로 그 분위기에 젖어 발이 푹푹 빠지는 숲길을 걷고 있는데, 트럭 하나가 올라와 멈추었다. 알고 보니 그 트럭은 고로쇠 수액을 수거하러 온 차량이었다. 길옆 나무 아래 놓아둔 물통에 찬 고로쇠 수액을 거두어가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길 옆 곳곳에 놓이 검은 통들이 보였는데, 그게 다 고로쇠 수액 통이었던 것이다.

좋은 공기와 기운을 흠뻑 마시고 천천히 왔던 길로 돌아 내려왔다. 계곡 입구를 나와 포장된 죽파리 마을길을 걸으니 관광객을 태운 버스 두 대가 지나갔다.

처음 영양 자작나무숲을 찾은 것은 2023년 1월 31일. 이때도 비슷한 감흥이었다. 처음 가본 자작나무숲도 좋았지만, 자작나무숲에 도달하기까지 계곡 길을 따라 혼자 깊은 산속을 걷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산속의 자연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계곡의 얼음 위로 걸어보기도 하며 천천히 1시간 이상을 걸어 올라갔다.

길은 양쪽에 높은 산줄기가 있어 햇빛이 들지 않는 구간이 훨씬 많았다. 계곡에는 얼음이 꽝꽝 얼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이고 추위는 많이 풀렸으나, 산 계곡은 영하의 기온이었다. 들리는 건 내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 등이 전부였다.

길 곳곳에는 아직 내린 눈이 녹지 않은 곳도, 빙판으로 변한 곳도 많았다. 한겨울이라 식물이 피우는 꽃은 없지만, 대신 겨울이 만들어낸 다양한 ‘얼음꽃’을 계곡 옆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들면 나목들이 늘어선 산 능선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겨울산에

들리는 건 바람 소리·새 소리 뿐

눈도 자작도 천지도 하얗구나

홀로 분위기 젖어 숲길 거닐어

◇1993년에 조성한 자작나무숲

검마산 첩첩산중에 자리한 자작나무숲에는 수령 30년 정도 된 자작나무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죽파리 마을은 조선 시대 보부상들이 정착하면서 개척한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죽파(竹坡)’라 불렀다고 한다.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산림청이 1993년 죽파리 검마산 자락 일대에 자작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솔잎혹파리로 소나무들이 죽으면서 황폐화한 곳에 자작나무를 심어 가꿔온 숲이다.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30.6ha에 12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다.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이 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나서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나무도 불을 붙이면 타는 소리가 나지만, 자작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그 소리가 크다.

자작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소리가 많이 나는 이유는 자작나무의 성분 때문이다. 이 나무의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서 그렇다. 기름 성분이 들어 있어 불이 잘 붙는 자작나무를 사람들은 불쏘시개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흔히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화촉을 밝힌다’라고 하는데, 이때 화촉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 기름을 활용한 것이다. 옛날 다른 기름이 흔치 않을 때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을 대신했다. ‘화촉(樺燭)’의 ‘화(樺)’자는 자작나무를 뜻한다. 같은 의미로 간혹 ‘화(華)’자를 쓰기도 했다는데, 지금 쓰는 ‘화촉(華燭)’이라는 말도 ‘화촉(樺燭)’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은 잘 벗겨지는데, 이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도 자작나무 껍질에 부처의 모습을 그리거나 불경을 적어 남겼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의 주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다.

자작나무가 추운 날씨에도 잘 버텨 낼 수 있는 것도 줄기의 이런 껍질의 덕분이다. 기름 성분이 있는 여러 겹의 얇은 껍질이 자작나무 줄기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혹한의 추위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이 기름 성분은 자작나무 줄기를 안 썩게 하는 기능도 한다. 백두산 근처의 집은 너와집이 많은데, 지붕을 자작나무 껍질로 덮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그 위에 돌을 가득 올려놓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의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에 쓴 시 중에 ‘백화(白樺)’라는 시가 있다. 백화는 자작나무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여름 자작나무숲은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하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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