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삼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났다. 그리고 420년 뒤 1965년 8월 1일 필자가 태어났다. 이순신 장군도 필자도 모두 을사생(乙巳生)이다. 우연의 일치다.

재미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명량대첩이 일어났을 때인 1597년 이순신 장군의 나이가 53세였다. 그리고 469년 뒤 한국영화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이 개봉되었을 당시 주연 배우였던 최민식의 나이가 53세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 명량서평 글을 쓰고 있는 당시 필자의 나이가 53세였다.

‘명량’을 사이에 두고 시간과 공간을 달리한 세 명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나이였다는 사실에서 필자는 ‘운명’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몸에서 풍기는 국방부의 포스는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다. 한때 필자의 꿈은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미술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에서도 미술을 전공했으니 어찌 보면 필자가 가졌던 소박한 화가의 꿈은 필자의 운명이었고 나의 가장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지방에서 맨몸으로 상경한 가난한 대학원생에게 서울생활은 가혹했다. 화가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름 없고 가난한 예술가에게 서울생활은 1년 365일이 겨울이었다. 호주머니는 항상 얼어있었고 그림 그리기만 좋아했던 필자는 그림 속 겨울왕국의 왕자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성과는 있었다. 학연과 지연을 뿌리치고 오직 실력과 인성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철학을 가지신 당시 덕원예술고등학교 교장이었던 고(故) 최양식 선생님의 도움으로 예술 고등학교에 강사로 나가 어렵게나마 화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청탁과 학연이 강하게 작용했던 어두운 시절에 실력과 인성만을 보고 사람을 뽑았기에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필자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 많은 분들이 필자처럼 전국에 흩어져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 선생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분명한 증거다.

포철의 박태준 회장처럼 최양식 교장선생님도 기본과 원칙을 강조했다. 그 기본과 원칙은 실력과 인성이었다. 지금도 서울 강연을 가노라면 덕원예술고등학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존경과 감사의 의미다. 박태준 회장과 최양식 교장의 얼굴에서 이순신을 읽는다.

당시 개인전을 규모 있게 하려면 1996년 당시로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그래서 나 같은 흑수저 출신의 가난한 화가가 대관료가 비싼 인사동에서 전시를 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다고 그렇다고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필자는 당당히 한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 안에 강렬한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A4용지에다 적어보았다. 작은 소망을 이루어 큰 소망에 도전하는 원동력을 삼겠다는 뜻이다.

무심코 적은 나의 버킷 리스트는 ‘세계 일주도전’과 ‘장군 인증샷’으로 나왔다. 아무리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긁적거리듯 적었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 생각해 보니 장군 인증샷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평소 이순신 덕후처럼 장군의 행적을 좋아했던 필자가 아니었던가? 수많은 작품을 장군의 이미지로 완성한 필자이지 않았던가? 필자에게 이순신은 박제된 과거의 영웅이 아니라 고단한 현실과 힘겨운 삶을 하루하루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결정은 칼처럼 실행은 번개같이 하랬다. 이순신이 가진 모든 정신을 닮고 싶은 마음에 장군 인증샷을 찍기로 결정했다. 의상은 어디에서 빌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TV속 한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필자는 서울의 KBS 방송국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의상실 팀장님께 이야기 한 끝에 장군 의복을 빌릴 수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담력이 생겨났는지 나도 모른다. 그땐 그것이 나에게 최선이었다.

26년 전에 찍은 필자의 이순신 덕후 사진의 탄생기다. 그리고 그 사진을 포스터로 찍어 전시회를 했다. 강렬한 한 장의 포스트 사진은 엄청난 이슈들을 만들었다. 많은 작품들이 팔려나갔고 김대중 대통령의 축전과 이회창 총리의 편지를 받은 것도 그 즈음이다. 한 장의 사진이 내 안에 강력한 직면의 힘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자신감 말이다. ‘꿈의 시각화’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꿈은 시간의 문제일 뿐, 반드시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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