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그렇게 살다 보면 분노의 크기만큼, 분노의 시간만큼 미운 대상보다 내 몸의 상처가 훨씬 커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공평하지 못해서 아프고 죄 없는 내가 더 고통스러운 현실에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대상을 용서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분명 죄 지은 자를 위한 선행이 아니다. 이 지독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용서가 그래서 힘들다. 그래서 심리학에서 용서를 ‘위대한 승리’라고 부른다.
50대 중반의 마음씨 착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연구실을 방문했다. 불편하고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중에도 예의와 품위를, 그리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착한 심성이니 당연히 상처도 크겠구나!’ 속으로 한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올 뻔했다. 부인이 자신의 사업 부도로 인한 모든 빚을 남편에게 던져 놓고 잠적했다고 한다. 해외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아내. 그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송장이 되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결혼 전 7살짜리 혼외 자식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아내의 파산 때문에 알았다고 했다. 경제적 파산에서 인간적 배신감에 따른 충격까지……. 죽기 위해 농약 3병을 사 놓고 3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내담자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용서를 위해 나를 찾았다고 했다. 아니, 살기위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담담히 자신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그분의 표정에서 구도자의 모습까지 읽혔다. 나에게 오는 순간, 이미 그분은 모든 걸 용서했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미워하긴 쉬워도 용서하긴 어렵다는 내 말에 그분은 깊은 공감을 표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죄까지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용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한 용서라는 것을 말해 주는 순간, 내담자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 힘드냐는 내 질문에 상황이 힘든 게 아니라 잊어버린 트라우마가 꿈으로 재현되는 게 힘들다고 했다. 머리로는 지웠는데 몸의 기억이 남아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면 예외 없이 가위에 눌린다고 했다. 그는 그 지독한 몸의 기억까지 모두 지워 버리고 싶어 했다.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않는 한 트라우마는 그의 상처를 오랫동안 그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가진 긍정의 빛으로 몸의 감각을 살리는 순간 그의 무의식도 빠르게 회복될 거란 것이었다.
심리 상담을 하다 보면 일부 사람들은 용서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 프로그램을 거부하기도 한다. 형식은 맞지만 본질은 아니다. 용서는 물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닮았다. 물속에 비친 모습은 타인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다. 분탕 친 물에선 자신을 발견할 수 없지만 평강한 물에선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 프로그램은 화와 분노 때문에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품어 주고 치유해 주는, 자신에게 베푸는 은혜다.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켜켜이 쌓아 놓고 타자를 용서하는 행위는 위선이다. 그래서 용서는 항상 자신에 대한 용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결국 용서란 자신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한 타자에 대한 포용의 사랑인 셈이다. 용서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평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