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청나라 태조·태종이 쓰던 궁궐
만주·몽골·티베트 양식 혼합
청나라가 천하 패권 차지하자
정궁 지위 잃고 별궁으로 남아

여행은 역시 누구와 더불어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지난달 27일부터 4일 동안 중국 선양(瀋陽)을 다녀오면서 새삼 느낀 일이다. 같이 간 일행은 물론이고, 우리 일행을 선양으로 초대하고 안내한, 선양에 사는 지인 부부의 정성과 환대가 각별했고, 덕분에 모두 즐거웠기 때문이다. 일행의 여정이 즐겁도록 부부는 물심양면에서 모든 배려를 다했다.
필자는 선양을 이번에 세 번째 찾았는데, 이번이 가장 좋았다. 이전의 여행은 큰 감동이나 즐거움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덕분에 먹고 자고 관광하는 모든 것이 즐겁고 멋진 여정이었다. 게다가 날씨도 나흘 동안 우리나라 좋은 봄 날씨와 같은, 쾌청한 신록의 날씨였다. 그들이 고심해 가장 좋은 때로 생각해 잡은 시기인데, 하늘과도 통했는지 모를 일이다. 부인은 사업을 하는 우리 동포(조선족)이고 남편은 선양음악학원(음악대학)의 한족 교수이다.
느긋하게 잡은 선양의 여행 일정은 북릉공원, 선양고궁, 골동품거리(古玩城), 서탑(西塔)거리(코리아타운) 등을 둘러보았다. 골동품 거리는 두 번이나 찾았다. 일행이 미술작가들로 골동에 관심이 많은데다, 서화가인 교수 역시 골동을 좋아해 그의 안내를 받으며 모두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시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관용 돌, 보석, 흑단, 도자기, 서화, 민속품 등 다양한 골동품들이 다 둘러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풍부했다. 선양 골동품거리 만큼 큰 중국 골동품거리를 본 적이 없다.
나도 둘러보다가 나무에 자개로 화조도를 새긴 작은 소반 하나를 쌌다. 자단(紫檀)으로 보이는 원목을 이용, 직사각형 나무판 한쪽을 약간 파내고 다시 그 안에 도드라지게 사각 선을 두른 뒤 그 안에 매화 봉우리 5개와 피지 않은 크고 작은 봉우리 20여 송이가 맺은 매화나무 가지에 암수 두 마리의 새가 앉아 놀고 있는 그림을 자개로 수놓은 작품이다. 꽃 새 송이와 잎이 달린 모란 한 가지도 매화 가지와 함께 새겨져 있다. 매화는 금색 빛이 도는 흰색이고, 모란의 꽃은 흰색과 자주색이고 가지와 잎은 흰색이다. 새의 꼬리는 녹색, 머리털은 붉은 색, 몸 털은 흰색 등으로 어우러져 있다. 네모 선 밖에는 꽃과 넝쿨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작은 나무토막 치고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음식 역시 다 좋았지만, 얇은 밀가루 반죽 익힌 것에 다양한 야채와 고기 등을 싸서 먹는 춘빙(春餠)이 특히 좋았다.
북릉은 청나라의 두 번째 왕이자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 무덤이 있는 곳이다. 참배로인 신도(神道)의 한가운데에 청나라 강희제가 홍타이지의 업적을 기념해 세운 신공성덕비정(神功聖德碑亭)이 있다. 현대적 공원으로 조성되어 엄숙한 분위기는 아닌 이곳은 선양의 대표적 명승지다. 청나라(후금)를 건국한 누르하치와 그 황후의 묘가 있는 동릉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8㎞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선양고궁은 청나라 초기의 궁전이다. 세계유산인 이 두 곳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각별한 조선족이 풍부한 해설을 하며 안내를 해 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사람도 부인이 우리에게 더 나은 문화유적 설명을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부른 그녀의 지인이었다.
선양고궁은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황태극·숭덕제)가 사용했던 궁궐이다. 1625년 누르하치가 처음 건립했고(대정전과 십왕전), 그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1631년 추가로 건물(대청문, 숭정전, 봉황루 등)을 지었다. 대체적으로 베이징 자금성의 형식을 따랐으나, 만주의 전통과 몽골·티베트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자, 선양고궁은 정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강희, 건륭, 가경, 도광 등 후대 황제들은 황실의 근원인 이곳을 찾아 청나라 황실의 정통성을 확인하곤 했다. 건륭제는 1780년 이곳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한 문소각(文遡閣) 등을 증축했다. 규모는 자금성의 12분의 1 정도. 규모도 작지만, 관리 상태나 건물 품격과 소장품 등도 많이 차이가 나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병자호란
1636년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
조선 사신에 '삼궤구고두' 요구
끝내 거부하자 강제로 무릎 꿇려
황제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이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 비난
그해 12월 병자호란 일으켜
◇오늘을 비춰보게 하는 역사의 현장
선양고궁의 대정전(大政殿)과 십왕정(十王亭)은 북방 기마민족의 이동식 텐트의 전통을 가미한 건물형식이다. 몽골족·만주족·한족의 건축양식이 모두 융합되어 있어 북방 지역 건축의 기운을 확인할 수 있다. 십왕전은 우익왕과 좌익왕 및 팔기(八旗)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정전 앞에 여덟팔자 형태로 늘어서 있다. 이 대정전은 청나라 황제의 즉위식을 비롯해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대정전 앞에서 조선족 안내자는 열정을 더하며 설명을 했다. 병자호란과 관련된 내용이다.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11일,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개칭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가 내세운 칭제(稱帝)의 명분은 △몽골 통일 △옥새 획득 △조선 정복 세 가지였다. 마침 당시에 선양에는 조선의 사신 나덕헌(1573~1640)과 이확(1590~1665)이 머무르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에게도 새로 황제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만주와 몽골은 물론 명나라를 대표하는 신료들까지 삼궤구고두의 예를 갖췄지만, 나덕헌과 이확은 따르지 않았다. 조선이 정묘호란(1627) 때 청과 약속한 것은 형제 관계였지, 삼궤구고두를 행해야 하는 군신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사신은 목숨을 걸고 홍타이지의 요구를 거부했고, 강제로 예를 올리게 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옷이 찢어지고 피까지 흘리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홍타이지는 기분이 몹시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두 사신을 살려 돌려보내며, 조선 인조에게 선사하는 초피(貂皮)를 비롯해 은과 인삼 등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요구를 담은 국서를 주어 보냈다. 국서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있다. 홍타이지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을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그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 서생(書生)들이 10년 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또한 인조를 비판하며 인조에게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군대를 움직이는 날짜까지 명시했다. 최후통첩이었다.
결국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다음해 2월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한강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해야 했다. 엄청난 치욕은 물론, 수십만 명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유례가 없을 정도의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도 청군 진영에 억류되었다.
조선족 안내자는 이런 내용의 설명을 하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청나라의 상황이 지금의 중국·미국·한국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와는 다르게,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한국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지도자들이 당리당략이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 생각하거나 꽉 막힌 고집 같은 명분에 빠져 실리를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해주는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당시 조선·명나라·청나라 상황
현재 중국·미국·한국과 비슷해
매일 정쟁만 일삼는 여야가
현명한 결정 내릴 수 있을까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100여 일 동안 미국은 외교, 통상, 안보 등 전방위에서 국제 역학관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고율 관세 정책을 비롯해,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에 대한 영향력 확대 욕심 등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모든 공세의 주 표적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밀착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과 러시아도 우리나라의 안녕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미중간의 갈등과 세계정세의 전개 상황에 따라 한국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결정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상식적인 국민을 실망시키는 정쟁만 일삼는 여야가 현명한 결정과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