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혼란, 예상 밖 재미
정형화된 매뉴얼 디자인 탈피
현장 감수성 살리는 전략 채택
인쇄물 대신 손글씨·수제 도장
투박한 라벨·상품 진열도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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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동의 카페 '로얄멜팅클럽'의 내부 모습이다. 바비인형을 테마로한 독특한 인테리어와 손글씨 감성의 스티커굿즈를 활용하여 고객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남동을 비롯한 서울의 감성 카페들은 브랜드 매뉴얼을 따르기보다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디자인 요소들을 활용하여 독특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포스기 주변에 부착된 손글씨 스티커, 임시 안내문, QR코드 등이 그 예시다.이러한 요소들은 비공식적이지만, 오히려 브랜드의 진정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남동의 카페 ‘로얄멜팅클럽’은 바비 인형을 테마로 한 독특한 인테리어와 함께, 포스기 주변에 손글씨로 작성된 안내문과 스티커를 활용하여 고객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디자인 요소들은 고객에게 브랜드의 개성과 감성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성수동에 위치한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 ‘빈브라더스’도 마찬가지로, 매뉴얼화된 디자인보다는 현장의 감성과 즉흥성을 중시하는 브랜드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카페는 메뉴판, 안내문, 가격표 등을 정형화된 인쇄물 대신 손글씨나 수제 스탬프를 활용하여 제작한다. 이는 고객에게 친근하고 인간적인 감성을 전달하며, 브랜드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현장 중심의 디자인 요소이다. 매장 내부는 일정한 레이아웃을 유지하기보다는 계절이나 이벤트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되는데, 이러한 유연성은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브랜드에 대한 신선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디자인에서 ‘매뉴얼’이란, 브랜드가 시각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리한 공식 지침서를 말하는데, 브랜드 로고, 색상, 타이포그래피, 여백, 이미지 톤, 인쇄물 양식 등 브랜드의 모든 시각 요소가 통일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매뉴얼 디자인 유형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CI/BI 매뉴얼이다. 로고의 사용 방식, 금지 규정, 최소 여백, 배경 대비 등을 정리한 기본 지침서이다. 둘째, 브랜드 북이다. 시각 요소 외에도 브랜드 톤&매너, 사진 활용 가이드, 콘텐츠 스타일 등을 포함한 보다 확장된 형태이다. 셋째, 제품 및 매장용 매뉴얼이다. 메뉴판, 간판, 유니폼, 포스기 주변 배치 등 매장 운영에서의 일관성을 위한 현장 매뉴얼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FM적인 브랜딩시스템 보다는 즉흥적으로 제작된 디자인 요소들을 활용함으로써 소비자에게 흥미로운 경험과 콘텐츠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예컨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인쇄물보다 손글씨나 수작업으로 제작된 스티커는 브랜드의 진정성을 강조한다. 메뉴 변경이나 이벤트 안내 등 상황에 따라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이러한 ‘즉흥성의 미학’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선 시대적 흐름으로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과거에는 매뉴얼 디자인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전달하는 핵심 도구였다면, 지금은 그 일관성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매뉴얼이 ‘정제된 공식 언어’였다면, 즉흥 디자인은 ‘현장에서 살아 있는 사투리’다.

한남동이나 성수동의 카페 외에도 이 흐름은 글로벌하게 확산되고 있다. 런던의 브루어리 기반 카페 ‘Allpress Espresso’는 메뉴나 안내문을 디자이너가 아닌 바리스타들이 직접 제작하도록 허용한다. “오늘의 커피”가 적힌 보드에는 손글씨로 쓴 간단한 코멘트와 스티커가 붙어 있고, 때로는 고객의 그림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러한 구성은 고급 커피라는 제품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라는 감성을 더한다.

도쿄의 빈티지 편집숍 ‘PUEBCO’ 역시 매뉴얼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모든 가격표는 점원이 직접 만든 수제 스탬프를 찍어 사용하며, 진열 방식도 일정하지 않다. 박스에 낙서한 듯한 폰트, 투박한 마스킹테이프 라벨, 알파벳 오타마저도 일부러 유지된다. 이 비일관성이 주는 ‘의도된 혼란’은 소비자에게 예상 밖의 재미를 제공하고, 브랜드와의 감성적 연결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경험·감성으로 소비자 잡다

정답보다 어설픈 진정성이 대세

즉흥 디자인은 ‘허술’이랑 달라

탄탄 기초·정체성 있어야 가능

즉흥성·진정성 두 토끼 잡아야

이는 단순한 DIY 감성 이상이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브랜드가 완벽한 ‘정답’을 주기보다, 현장에서 ‘함께 완성하는 경험’을 원한다. ‘정돈된 정체성’이 아닌, ‘흔들리는 진정성’이 오히려 더 공감을 부른다. 손글씨 스티커 하나, 임시로 인쇄된 흑백 안내문 한 장이 브랜드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시대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 속에서 디자이너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즉흥성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되는 ‘기초 매뉴얼’이 더욱 중요해진다. 즉흥 디자인은 허술한 디자인과 다르다. 오히려 탄탄한 정체성 위에서만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기본 CI/BI 매뉴얼을 갖춘 브랜드일수록, 임시 안내물이나 현장 메시지에서 더욱 유연하고 감각적인 변형을 시도할 수 있다. 즉, 매뉴얼의 존재가 ‘즉흥 디자인’의 질을 결정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코펜하겐의 미니멀 브랜드 ‘NORM Architects’는 핵심 로고와 컬러 팔레트를 철저히 유지하면서도, SNS에서는 손글씨 스케치, 작업 공간의 낙서 같은 비공식적 이미지들을 함께 활용한다. 이는 브랜드가 공식성과 비공식성, 규율과 유희를 얼마나 능숙하게 오가는지를 보여준다.
 

편집숍
국내 편집숏 29CM의 온오프라인 매장의 모습이다. 공식 메뉴얼에서 벗어나 고객의 개봉 경험에 감성을 입힌 디자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특유의 디자인감성이 패키지만 보아도 '29CM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정체성이 확실하게 구축되어있으며, 사용자와 함께 완성해나가는 '열린 디자인 전략'의 대표적 사례이다.

 
29CM
국내 편집숏 29CM의 온오프라인 매장의 모습이다. 공식 메뉴얼에서 벗어나 고객의 개봉 경험에 감성을 입힌 디자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특유의 디자인감성이 패키지만 보아도 '29CM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정체성이 확실하게 구축되어있으며, 사용자와 함께 완성해나가는 '열린 디자인 전략'의 대표적 사례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 사례는 국내 편집숍 ‘29CM’의 패키징 전략이다. 전통적인 유니폼 박스 디자인 대신, 캠페인 주제에 따라 포장박스를 계속 바꾼다. 검정 테이프, 박스 옆면의 짧은 문장, 손으로 붙인 스티커 한 장이 고객의 개봉 경험에 감성을 더한다. 공식 매뉴얼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근간에는 ‘29CM다움’이라는 정체성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디자인은 이제 완결된 매뉴얼을 전달하는 시대에서, 사용자와 함께 완성해가는 ‘열린 서사’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카페, 편집숍, 로컬 브랜드 등 소규모 브랜드들에게 즉흥 디자인은 단순한 예산 절감 차원이 아닌 ‘전략적 감성화’ 도구로 자리잡았다.

브랜딩 디자이너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완벽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보다는, 현장에서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는 ‘디자인 사고의 틀’을 설계해야 한다. 때로는 어설픈 손글씨가, 정제된 인쇄물보다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인이 더 이상 정답을 말하지 않는 시대. 매뉴얼이 사라진 듯 보이는 현장에서도, 본질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즉흥성과 진정성이 공존하는 브랜딩이다.
 

 
류지희<디자이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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