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있었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향기 나는 사람이었다.
필자가 첫 교편을 잡은 시점이니 꽤 오래전의 일이다. 서울의 한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미술과 학생들의 실기를 지도한 적 있었는데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교사들 모두에게 각인이 될 만큼 아주 특별했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매번 선생님들을 볼 때 마다 허리를 굽혀 상냥한 미소로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그 여학생은 선생님들 사이에선 칭송의 대상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여학생의 따뜻한 미소와 인사를 능가하는 학생들을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진정성 있는 인사의 감동은 정말 깊이 각인되고 또 오래가는 모양이다.
‘인사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칼칼한 음성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선친께서 나에게 미술선생님 한분을 소개해주셨다. 6.25 전쟁 통에 이중섭 선생님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신 분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고 한상돈 선생님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을 보자말자 나에게 인사부터 드리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난 두 손을 모으고 최대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배꼽 인사를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손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께서는 내가 큰절을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치시곤 막무가내로 큰절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때 내가 잠시 주춤한 것은 그 장소가 방도 아니고 그냥 일반 길거리였으며 전날 비가 와서 바닥에 물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였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성화에 졸지에 길바닥에 엎드려 큰 절은 올렸다. 그 때의 창피함과 황당함은 아직까지 황당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아버지의 속뜻을 알았다. 물론 내가 아버지의 나이를 넘긴 후에 말이다. 스승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어 조금이나마 아들을 잘 봐주시길 염원했던 아버지의 속뜻 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길거리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드릴 어른이 없다는데 슬픔이 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 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에 앞서, 당신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나날을 신경써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한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라고 인사의 정의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내렸다.
인사가 단지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 의례적으로 던지는 대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만나는 것이고 영화 ‘아바타’에서 네이티리가 이크란을 사로잡으려는 제이크 셜리에게 던졌던 나비족의 언어 ‘사혜일루’(교감)의 의미가 동시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부부 상담을 하다보면 참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이혼을 했거나, 이혼을 하려고 상담을 요청하는 부부들을 만나면 상담 직전에 이미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상황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상담사의 직감이라고 하기에는 몸짓이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다. 직감적으로 두 사람의 눈빛에서 사랑의 온도를 느낀다. 때론 나의 이러한 직감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나의 직감은 유명한 쪽집게 점쟁이처럼 빗나가는 법이 없다. 관계회복을 위해 상담사를 찾아오는 것은 같지만 해결의 노력을 보이는 부부들은 힘들지만 눈을 짧지만 마주 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부들과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 않는 부부들은 관계회복이 아주 더디거나 아니면 파탄이다.
그만큼 몸의 대화는 본능에 충실하며 언어를 뛰어넘는 힘이 있다. 인사는 경제적 효용성, 사회적 관계성, 심리적 안정성, 미래의 담보성까지 한꺼번에 네 가지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힘이 있고 새끈하게 호흡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인사에는 ‘face to face’의 의미와 ‘I see you’의 의미가 동시에 읽혀져 ‘눈부처’의 보석 같은 단어가 탄생하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마주치고 다가가는 인사를 ‘먼저 나를 열고, 타인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어떤가? 표현까지도 아름답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