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국 칼럼니스트
그녀들은 동쪽에서 정체불명의 낯선 민족이 화물칸에 실려와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빵이 식을세라 모포에 감싸 당나귀에 실은 뒤, 한 번도 만난일이 없는 그들을 찾아왔다. 한인들이 울면서 그 빵을 먹는 동안, 카자흐 여인들도 울음에 합세했다. 빵과 울음, 새로운 삶이 거기서 시작됐다. 그들은 톈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모여 이뤄진 강물을 젖줄 삼아 땅을 일궈 다시 일어섰다.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中.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 백석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북으로 간 시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작품을 사랑하지만 살아서는 참 슬픈 인생을 살았다. 지워진 그의 세월을 다시금 그려낸 김연수의 이야기는 아름답기도 하고 참 쓸쓸했다. 그런 가운데 특히 위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해 우연찮게 만난 김연수에게 고려인과 카자흐 여인에 대해 물어봤다. 취재를 통한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정확히 어딘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곳을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기회는 어렵지 않게 찾아왔다. 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 몇 개국을 방문할 일이 생겼고 나는 일정에 앞서 혼자 먼저 카자흐스탄 알마티부터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계신 지인, 한국과 카자흐스탄 양국 간 인도적 봉사활동에 노력 중인 대한민국 예비역 장성 이재완 장군께서 그 역사적 현장에 업무 차 가실일이 있어 나는 거기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어쩌면 말씀은 안하셔도 나를 배려한 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카자흐스탄 최대도시 알마티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약 300km를 달려 그곳을 찾았다.

실크로드의 땅 중앙아시아, 그중에서도 카자흐스탄은 초원의 길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우리에게 초원은 목가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만 그들은 초원을 쓸쓸하고 황량한 곳으로 여긴다. 그런 길을 달려 도착한 고려인 첫 정착지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그냥 황량한 들판이다. 혹독한 첫 겨울,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그곳 야트막한 언덕 주변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 그 겨울, 도저히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가혹한 환경에도 아기가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노인이 되었던 그 아기는 이제 그곳에 마련된 고려인들의 무덤에 잠들어 있다. 태어나고 영면에 든 곳을 같은 자리에 두고 있는 그곳은 지금도 쓸쓸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고려인들의 힘들고 슬펐던 역사와, 이들과 함께 울어준 카자흐 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는 우호공원이 조성되어, 우리가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며 감사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그리고 몇몇 항일투쟁의 영웅들도 함께 그곳에서 기리고 있어 서로서로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고 있을 것만 같다. 이재완 장군을 중심으로 한 많은 기관과 사람들의 노력으로 추모비 등 우호공원이 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나마 덜 쓸쓸하다.

소설가 김연수가 그린 장소는 ‘우슈토베 역’이다. 지금은 조금 퇴락한 것 같은 시골의 상점과 인가가 주변에 형성되어 있지만 고려인들이 강제로 연해주에서 열차 화물칸에 태워져 한 달간 6600km를 달려 도착할 당시의 그곳은 역사 외 주변에 아무 것도 없이 내리는 눈에 진창으로 변해버린 길만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여인들의 도움으로 기운을 차린 고려인들은 그곳에서 7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첫 겨울을 나고 바로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에스켈디’ 지방으로 많이들 옮겨가 그곳에서 농사를 시작하고 학교도 세워 후손들도 키우며 부를 축적해 갔다.

지금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러시아 및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는 3~4세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들은 가혹한 현실에 살아남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우리말도 모른 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새도 없이 살아간다. 그들이 강제이주당한 그곳이 쌀농사의 최북단 지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려인들은 그야말로 삶을 개척해 나갔다.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에 의한 비극을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지만 그 상흔은 깊고 길다.

하지만 도저히 일어서기 힘든 조건에서도 삶을 일궈나간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앞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빵을 굽고 그것이 식을세라 담요로 덮어 가져다준 카자흐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 특히나 함께 울어주었다는 것은 이것보다 더 큰 위로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주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칼릴 지브란이 말했다. “나를 위하여 울어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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