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색, 보라
오묘한 색이 영감 불러일으켜
철학자·예술가가 좋아하는 색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색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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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봉황이 깃드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 오동나무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팔공산 동화사는 오동나무 꽃이 화려한 절이라는 이름이다.

신록은 점점 더 짙어지고 푸르름은 거의 하나의 색깔로 수렴하는 계절이다.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소가 가까워질 때 쯤 문득 초록 사이로 우뚝 솟은 보라색 꽃이 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속도를 줄여 잠깐 올려다보니 참오동나무가 아닌가. 보라색꽃 나무가 신록의 한 가운데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차를 휴게소에 잠시 세웠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보라색은 참으로 오묘한 색이다. 보라색은 모든 색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롭다. 때로는 슬픔의 색이기도 하며, 꿈과 환상을 심어 주는 색이기도 하다.

색은 빛의 반사에 의해 눈에 보이는데 빛을 파장의 길이에 따라 분석한 것을 보면 파장이 가장 짧은 빛을 감마선이라 하고 다음으로 엑스선,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 마이크로파, 라디오파로 분류한다. 그중에서 가시광선은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말하는데 무지개빛을 생각하면 되겠다. 지구상의 모든 식물은 태양의 가시광선을 이용하여 살아간다. 그만큼 가시광선은 생명의 빛이다. 가시광선은 빨간색에서 시작하여 보라색까지 퍼져 있다. 빨간색은 적외선에 가깝고 보라색은 자외선에 가깝다. 하늘이 파란 이유는 여러 가지 색이 섞인 태양의 백색광이 대기 중의 공기와 만나 산란하는데 이때 보라색은 그 양이 적으며 인간의 눈에는 그리 민감하지 않고, 파란색은 우리 눈에 매우 민감하여 산란하는 양도 많다. 그래서 하늘은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늘상 보던 초록색 가운데 보라색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푸른 목장에 젖소나 갈색의 소만 보다가 갑자기 보라색 소가 한 마리 눈에 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보라색 소에 주목할 것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기업가인 세스 고딘(Seth Godin)의 퍼플 카우「Purple Cow: Transform Your Business by Being Remarkable」에 나오는 이야기다. Remarkability, 즉 마케팅에는 ‘주목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선했다고나 할까. 이날 갑작스럽게 다가온 참오동나무는 나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보라색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직관이나 영성이 뛰어나다. 순간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켜 작품을 쓰기도 하고 완성하기도 한다. 초록 바탕을 뚫고 연보라 꽃을 단 참오동나무는 교만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아 보였다. 푸른 신록 속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권위와 고결한 내면성을 간직한 채 유유히 바람과 대화하는 모습에 이끌려 카메라 셔터를 수없이 눌렀다.

산허리 주변에는 참오동나무를 둘러싸고 아까시나무며, 층층나무, 그리고 산기슭으로 내려올수록 찔레꽃들이 만발해 있다. 이들 나무의 꽃은 모두 하얀색이다. 초봄의 화려한 원색의 꽃들이 가고 여름으로 다가갈수록 커다란 큰키나무와 지천에 피어 있는 작은키 나무인 찔레의 꽃잎 색깔은 모두 흰색이다. 그 이유는 우선 여름으로 갈수록 햇빛의 강도는 세어진다. 뜨거운 태양 에너지를 반사해서 꽃잎이 자외선 등에 의해 세포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수분 부족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가뭄이 심할 경우 흰색의 꽃잎은 빛을 반사하여 탈수를 줄이기도 한다. 또한 흰색의 꽃은 곤충이 많아지는 여름으로 갈수록 수분 수정이 대부분 낮에 이루어지지만, 밤에도 수분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한 흰색을 드러내어 곤충을 유도하는 목적도 있다. 나무는 이처럼 자연의 변화와 순리를 잘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권력의 상징

예부터 봉황 깃드는 신성한 나무

조선시대 왕실서 주로 사용

궁중 음악 악기 재료로 쓰여

역사적으로 옷의 색깔로 관직과 품계를 구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왕실의 경우 왕은 황금색 혹은 황색의 조복을 착용했고, 가장 높은 품계인 정1품과 종2품의 경우 자주색 계열의 관복을 입었다. 이렇듯 보라색은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보라색 꽃을 피우고 서 있는 참오동나무는 세계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보라색 염료는 추출하기가 매우 어려워 고대 로마에서는 왕족과 성직자들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로마 황제를 가리켜 ‘보라색 옷을 입은 자’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우도 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드는 신성한 나무로 왕권과 태평성대를 상징하였다. 조선시대 유명 문장가 신흠은 동천년로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오동나무는 천년을 지나고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읊었다. 이 시를 퇴계 이황 선생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동나무의 고결함과 절개, 그리고 선비의 품격을 상징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주목(朱木)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오동나무도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

봉황이 내리는 유일한 나무, 조선시대 왕실의 문장도 또한 봉황과 오동나무다. 왕실의 품격을 상징하고 궁중 음악에 쓰이는 대부분의 악기는 오동나무로 만들었다. 또한 왕실의 장례를 위해 오동나무로 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왕비, 세자빈, 궁중 여성의 의복에도 오동나무 문양이 자수로 새겨졌다.
 

군자의 나무

늦게 피고 먼저 지는 꽃 '겸손'

곱고 단단한 목재 '충실한 내면'

고귀한 향기 '진정한 아름다움' 

이렇듯 오동나무는 왕과 당대 최고위 관료가 쓰는 나무이자 꽃의 색깔도 보라색으로 최고의 품격과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오동나무 심어 딸 시집 보낸다‘는 말도 딸을 낳으면 혼수 가구재를 미리 준비한다는 지혜와 딸을 귀히 여기는 문화적 의미도 널리 퍼져 있었다. 오동나무 재질에 관해서도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는 진저의 「동보」를 인용하여 나무의 재질에 대해 극찬하였는데 ‘오동나무는 채벌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더라도 벌레가 꼬이지 아니하며, 물에 젖거나 습기가 차더라도 부패하지 아니하며, 바람이 불어닥치고 햇볕에 쏘이더라도 균열이 생기지 아니하며, 비에 젖거나 진흙이 묻더라도 말라 붙거나 이끼가 끼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오동이라고 이름 붙이는 나무들이 몇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참오동, 개오동, 벽오동, 꽃개오동나무 등이다. 참오동나무는 오동나무과로 잎은 육각형에 가깝고, 보라색 꽃이 핀다.

국립공원 필공산에 동화사(桐華寺)라는 절이 있다. 동화사의 동은 오동나무이고 화는 빛날 화로 ‘오동나무 꽃이 아름다운 절’이라는 뜻이다. 특히 칠성각 앞마당에 있는 유난히 큰 오동나무가 ‘심지대사 나무’로 팔공산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했던 심지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 연노랑에 가까운 꽃이 핀다. 청송에는 수령 400년 된 개오동나무 천연기념물이 있다. 벽오동나무는 벽오동과로 줄기가 파랗다. 꽃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 흰색에 가까운 꽃이 핀다. 이렇듯 오동나무라도 모두 유연 관계가 다른 식물들이다. 또 중국이 원산인 당오동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마편초과로 열매가 붉은색을 띤다. 그 외에도 예덕나무를 야오동, 이나무를 의동, 돈나무를 해동이라 부른다.

참오동나무의 꽃은 밤하늘의 맑고 청정한 달빛과 같다. 태양처럼 눈부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산천의 초록 바탕을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오동나무는 군자의 나무다. 늦게 피고 먼저 지는 꽃은 겸손과 절제를, 곱고 단단한 목재는 충실한 내면의 가치를, 느리게 자라지만 유용함은 인내를, 악기로 쓰임은 공명과 공감의 삶을, 조용한 꽃과 고귀한 향기는 내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오동나무는 진정 이 카오스의 시대가 요구하는 선비나무가 아닐까.

 

임종택<생태환경작가·다숲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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