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8m 거대한 석조 불상
3등신에 늘어진 귀·짧은 목
균형미·비례미·세련미 없어
오랫동안 ‘못생긴 부처’ 대명사
“한국 최악의 졸작” 박한 평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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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삼성각에서 바라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불상은 얼굴 보다 더 큰 모자인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모자는 2층의 보개(寶蓋:덮개)로 되어 있고, 사각형 덮개의 각 귀퉁이에는 풍탁(風鐸)이 하나씩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낸다.

충청도 역시 취재나 여행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곳곳을 둘러보았다. 사찰로는 계룡산의 갑사·마곡사·동학사·신원사를 비롯해 덕숭산 수덕사, 속리산 법주사 등을 한 차례 이상 다녀왔다. 논산 쌍계사도 꽃살문과 닫집 취재를 위해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근처에 있는 논산 관촉사는 그동안 가보지 못했다.

특히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이나 팔상전 등과 더불어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알게 된 충청도의 대표적 문화재들이다. 그래서 한 번 가서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처까지 가도 여유가 없거나 일정 코스에 들지 않아 마음에 있어도 찾아가보지 못했다.

이번에 논산에 갈 일이 생겨, 좀 일찍 가서 은진미륵을 직접 보겠다고 생각했다. 2022년 12월에 문을 연 한국유교문화진흥원에서 서울의 경제지 중심의 일간 신문사 신입 기자들 30명 정도가 이곳에서 다도 체험, 공연 관람 등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기자와 선비정신’을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해 가게 된 것. 대구에서 승용차를 몰고 좀 일찍 출발했다. 오후 4시 강의예정인데, 오후 2시 30분쯤 관촉사에 도착해 여유롭게 관촉사를 둘러볼 수 있었다.

관촉사는 평지에 솟은, 해발 100m도 안 되는 작은 야산(반야산) 비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빈 점포들이 눈에 띄는 길을 따라 잠시 가니 작은 주차장이 보이고 바로 천왕문이 나타났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돌계단을 나오고 계단을 오르다 누각인 반야루 아래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비교적 넓은 마당과 중심 법당인 대광명전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거대한 은진미륵을 마주하게 된다.

◇투박하고 친근한 모습

소나무들이 자라는 산의 암벽을 병풍 삼아 서 있는, 높이가 18m 정도인 이 거대한 석조 불상은 커다란 자연 암반 위에 서 있다. 불상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매우 큰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워낙 커서, 특히 얼굴 부분이 커서 멀리서도 그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온다. 큰 불상이지만 장엄함이나 경외감보다 친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몸체를 비롯해 전체가 비례나 균형이 맞는 것도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관촉사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이 은진이어서 ‘은진미륵’으로도 불린 관촉사의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통적인 불상과는 다른 모양과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이 불상은 얼굴 보다 더 큰(높은) 모자인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모자는 2층의 보개(寶蓋:덮개)로 되어 있고, 사각형 덮개의 각 귀퉁이에는 풍탁(風鐸)이 하나씩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귀가 매우 큰데 그 양쪽 귀를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덮고 있고, 팔찌를 낀 오른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모습은 불상이 보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상당히 크다. 전체적인 비례도 잘 맞지 않는다. 어깨에 닿을 듯이 크게 늘어진 귀, 짧은 목, 얼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어깨, 두터운 입술과 큰 입, 큰 눈, 몸체 등이 전체적으로 조화롭지는 않다. 균형미와 비례미, 세련미를 느끼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못 생긴 부처님’으로 불리며 전문가들의 홀대를 받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김원용은 ‘3등신에, 미련하게 생긴 얼굴, 불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돌기둥, 신라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는 박한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

그래도 이 은진미륵은 예로부터 민중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죽어서 온 영혼에게 이승에 있을 때 논산(연산)의 개태사 가마솥(둘레가 9m 넘는 대형 솥)과 관촉사 은진미륵을 봤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봤다고 대답하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못 봤다고 대답하면 ‘살면서 그것도 한 번 안 보고 뭐 했냐’며 버럭 화를 낸다고 한다. 은진미륵에 대한 민중들의 애정과 존중이 나타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미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논산에서 은진미륵은 오래 전부터 ‘잘생김’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요즘도 어린아이에게 ‘고놈 참 은진미륵 닮았네’라고 하면 지역에서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한다. 논산에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것도 은진미륵이 굽어 살피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1963년 국보가 못된 까닭과

2018년 국보 승격된 이유가 같아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

뛰어난 독창성 등 높은 평가

◇2018년 국보로 승격

시간이 여유가 있어 불상 옆에 있는 삼성각으로 올라가 불상을 보기도 하고, 삼성각을 거쳐 대광보전 뒤쪽 숲길을 걸으면서 푸른 녹음 사이로 수시로 드러나는 불상의 얼굴 모습이 멋지게 다가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불상은 한반도에 현존하는 석조 불상 중 20세기 이전에 세워놓은 것으로는 가장 거대하다. 높이 18.12m, 둘레 9.9m. 고려시대인 968년에 조성을 시작, 1006년에 완공됐다. 20세기 이후에는 이보다 더 큰 불상도 건립됐다. 1990년에 세운 법주사 청동대불은 33m나 된다. 이 불상은 이후 부식이 일어나면서 얼룩이 지자 2000년부터 옻칠과 금박 입히기 등 개금불사를 거쳐 2002년 6월 금동불상으로 거듭났다. 팔공산 동화사에는 1992년에 준공된 석조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있는데, 높이가 33m(13m 높이 좌대 포함)나 된다.

은진미륵은 천연의 화강석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암반을 사용해 불상의 발을 조성한 대좌(臺座) 부분, 허리를 기준으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寶蓋)를 각각 따로 만들었다. 이것을 하나씩 맞춰 얹어 거대한 불상 조성을 마무리했다.

불상 미간에 황금색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가 빛나는데, 이 백호는 원래는 천연 수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헐거워지게 되고 1521년에 저절로 떨어져 네 조각으로 깨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정 백호를 대신해 원반형의 청동 백호를 만들어 보수했다. 이 청동 백호는 400여 년 세월이 지나면서 녹이 슬고 녹물이 불상 얼굴로 흘러들어 흉하게 되자, 1960년에 반구 형태의 유리 백호를 제작해 교체했다. 최근 다시 청동 백호 복제품을 제작해 설치했다. 이 복제 백호는 옻칠 후 개금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불상 눈동자의 검은 부분은 색칠한 것이 아니고, 눈동자의 크기에 맞게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점판암을 박아 넣어 장식한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다가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과 ‘뛰어난 독창성’이 승격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1963년 평가에서 국보가 되지 못한 까닭과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이유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든 것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은진미륵이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은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국보 지정 이유를 밝혔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어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파격과 사실성 결여를 이유로 국보가 되지 못했다가, 그 점이 이번에는 오히려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스스로 황제라 칭한 고려 광종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불상의 파격은 고려 초기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문화적 역량, 민중들의 간절한 미륵 신앙, 그리고 거대한 규모와 재료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만의 독창적인 예술 양식과 미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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