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역사는 오랜 기간 기술의 발달과 인간 욕망의 상호 작용으로 발전해 왔다. 과거에는 역사의 분기점 마다 한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에 의해 큰 변혁이 일어났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집단 지성이 오히려 변화를 주도하는 경향이다. 그런데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 그 사회에만 국한하여 몰입하게 되면 개혁의 방향성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의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장 차고 개혁을 외치는 군상들은 독창적인 길을 걷는다고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길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선조의 길을 온전히 따라 갈 수는 없겠지만 모방하면서 나아가면 된다. 우리가 역사를 논하는 이유 중 하나도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가 되는 방법은 자신의 역량에 의한 경우와 운에 의한 경우가 있다. 자신의 역량으로 리더가 되는 경우 유사시에 실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서 위기에 직면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운에 의해 리더가 된 경우 타인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폐해가 발생하여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개혁은 새로운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므로 그 과정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새로운 제도나 정책을 도입하게 되면 그동안 낡은 제도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반대 세력들은 빈틈을 노리고 집단으로 격렬하게 저항한다. 반면 새로운 제도와 정책으로부터 혜택을 보은 집단들은 그저 표정 관리하면서 개혁 지지에 소극적이다. 그 결과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의 역량에 의해 대통령이 됐다.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경력과 용인술로 개인적인 역량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지지도는 높았지만, 국내 정치적 기반은 약했다. 반면 원조 보수당인 한민당은 기호 및 호남의 재벌과 중산계급 등 경제적 부르조아 출신들로 구성됐다. 신간회에 참여한 소극적 항일투사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관료와 전문가 출신 등이 참여했지만 대중성은 낮았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탁과 반공을 통한 건국 과정에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러나 권력구조와 정책은 생각이 달랐다. 이승만은 한민당에 포획되지 않으려고 대통령제를 선호한 반면 대중성이 낮은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선호했다. 결국 이 전대통령은 대통령제를 통과시켰으며, 국무총리 임명 과정에서 한민당 출신인 인촌 김성수를 배제했다. 국민 대중 속에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한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민국당(민주국민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농지개혁이라는 정책적 갈등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에 반대하는 한민당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이 주장한 대통령중심제에 강경하게 반대했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했다. 지주계급이 많은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은 그들의 정치적 기반인 소작료 수입 및 경작제도의 붕괴를 우려하면서 지주층의 이익을 고려해 지가보상률을 고율로 책정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은 조봉암 장관을 앞세워 농민과 지주 양계급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낙착, 통과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개인의 역량 보다는 운으로 대통령이 된 경우다. 국민의힘 안에는 명사들은 많지만 대중성이 낮기 때문에 대선 승리 방정식으로 외부영입 인사인 윤석열 전검찰총장을 선택했다. 윤 전대통령은 개혁에 대한 당위성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부터 준비해야 되는지, 그리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국민의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개혁 반대 세력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설득하는 방법과 국민의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둘 다 실패했다.

정책 실패 중 하나가 의료개혁이 아닐까? 의료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의사협회를 설득해야 한다. 예과부터 본과, 그리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의과대생과 의협을 대상으로 하는 개혁을 안이하게 접근한 것이 큰 잘못이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면서 보수화 되어 있는 의료인을 설득하지 못하고 적으로 만든 것이 정권의 힘을 떨어뜨린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1.8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허접한 골판지로 만든 상 위에 식판을 놓고 식사하는 윤 전대통령의 모습은 인권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다. 그러나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서는 환골탈태해야 하는 국민의힘이 더 안타깝다. 대중성도 낮고, 역량도 부족하고, 운마저 없는 국민의힘이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천막당사 시절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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