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핵전쟁, 전염병, 기후변화, 소행성충돌, 외계인의 침략,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반란 등 다양한 내용들이 소설, 드라마, 영화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데 커다란 역경과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성취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 종말물의 결론은 폐허가 된 세상에서 주인공과 동료들이 역경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는데 필자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완전히 무너진 이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예전 같은 문명을 다시 이룰 수는 있을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기에 공기와 같이 그 소중함을 생각해 볼 기회가 잘 없지만 종말 후 살아남은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지금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까? 빵의 기본 재료는 밀가루, 우유, 달걀, 이스트(효모) 등이다. 농사를 지어 밀을 얻고 밀가루로 만드는 건 대체 어떻게 하면 될까? 우유, 달걀을 얻기 위해 소와 닭을 기르고 번식시키는 것은 농사보다는 할 만하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나 잘 해낼 자신은 없다. 생각이 효모에 이르면 그저 막막할 뿐이니 효모 없는 빵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무시하도록 하자. 장기계획이 될 농사와 목축은 포기하고 당장 나에게 밀가루와 우유, 달걀이 주어진다면 빵을 만들 수 있을까? 재료를 잘 섞어 반죽하고 구우면 되겠다 싶지만 반죽할 그릇과 오븐 등의 도구가 필요하고 재료와 도구가 모두 준비되어도 내 손을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 입에 넣었을 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렇듯 빵 하나를 만들 때도 농업, 목축업, 공업, 제빵 등 무수히 많은 기술이 필요하듯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분업화, 전문화를 통해 여러 산업이 관여한 결과물로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 갖춰져도 소용이 없는데 아포칼립스가 일어난다면 수 많은 전문분야를 모두 복구하기는 불가능하기에 문명은 사라질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흥미로운 상상으로만 남아야 할 일이 의료계에 벌어지고 있다. 의대정원확대를 필두로 한 의료농단 사태가 1년 넘게 지속되며 의대생, 전공의들이 학교, 병원을 떠났다. 천만다행으로 의대생, 전공의 복귀가 시작 되었지만 무너진 의료시스템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과중한 업무를 도맡으며 병원을 지키던 교수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긴 시간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이미 병원을 떠났다. 돌아온 의대생, 전공의들의 졸업과 전문의 취득 시기가 미뤄지면 의료인력의 공백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도 걱정이다. 무엇보다 필수의료에 종사하던 많은 전공의가 세상의 비난과 푸대접에 상처 받아 돌아오지 않아 필수의료의 맥이 끊어질까 두렵다.
의료시스템의 몰락은 반드시 사회 모든 분야에 문제를 동반하게 되고 의료계 종사자만이 아닌 우리 국민 모두가 걱정해야 할 이슈이다. 의료계를 새롭게 가꾸고 발전시켜 나갈 의대생, 전공의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응원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한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을 다시 누릴 수 있기를 바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