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한 포기
거름·비료도 주지 않았는데
마당 귀퉁이에서 저절로 자라
직접 심은 호박보다 왕성한 성장
그 모습 지켜보는 재미가 각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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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저절로 싹을 틔운 호박 한 포기가 시골집 마당 한쪽을 온통 뒤덮고 있다.

올해는 입추(8월7일)가 지나도 가을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더웠다. 습도가 높은 무더위가 계속됐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가 고통으로 다가왔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더위가 가시고 선선해져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처서(8월23일) 전후에는 오히려 더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더위를 보여주었다. 처서 때 대구와 주변 지역의 기온은 섭씨 37도가 넘었다.

농촌에는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농작물과 잡초는 그 기운이 꺾이지 않고 왕성하게 자라난다. 고추와 가지는 잎이 축 쳐지는 더위가 계속되어도 왕성하게 열매를 맺고 쑥쑥 키워가는 것 같다. 토마토 역시 붉은 열매를 따먹고 따먹어도 계속 초록 열매를 새로 맺어 붉은 색으로 변화시켜 간다. 호박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넝쿨과 잎으로 덮어가며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열매와 잎으로 여름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이들은 가을이 되면 여름보다 더 맛있는 열매를 선사한다. 벌써 그 맛이 기다려진다. 이와는 달리 상추나 부추는 8월 중순이 지나면서 꽃대가 올라오고 꽃을 피우면서 다음해를 준비하는 가운데 한 해 삶을 마칠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고마운 채소들 중에 올해는 호박의 왕성한 생장력을 새삼스럽게, 특별하게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호박 한 포기의 힘을 실감하고 있다.

시골집 마당은 3분의 2 정도를 텃밭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있고, 나머지 마당은 붉은 벽돌을 깐 부분과 잔디 부분 등으로 되어 있다. 지난 봄, 아래채 옛 마구간 앞 댓돌 틈새에 호박 싹 세 개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심은 것이 아니었다. 지나쳤다가 며칠 후 좀 더 자라자 다른 잡초를 뽑으면서 호박 싹도 함께 뽑아버리려다가, 한 포기는 그냥 두고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 포기는 그대로 두었다.

호박은 예전부터 땅 힘을 많이 기른 뒤 심어야 잘 된다는 말을 누누이 들어왔고, 항상 그렇게 해서 씨앗을 심었다. 미리 구덩이를 깊게 파고 거름과 재 등을 넣어 땅을 숙성시킨 뒤 씨를 심었다. 그런데 이 호박 싹이 난 곳은 전혀 그런 땅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마당으로 사용하던 땅의 귀퉁이였고, 어떤 거름이나 비료도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호박은 시들지 않고 계속 자라났다. 초기에는 뒤뜰 텃밭에 심은 호박들보다는 세력이 좀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 나갔다. 장마 이후에는 그 세력이 더 세지기 시작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져 갔다. 붉은 벽돌 쪽으로 넘어오는 가지들은 모두 잔디밭 쪽으로 몰아넣어 대문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8월에 접어든 이후 더 세력이 강해지고 가지가 급속히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방치해야 되겠다고 싶어 그냥 두었다.

한 번은 호박 넝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줄기의 마디마다 잎과 꽃, 넝쿨손이 나고 새 줄기가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넝쿨손은 줄기를 지탱하는 손발 역할을 하지만, 환경에 따라 땅속으로 뻗어 영양분을 흡수하는 뿌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호박은 이처럼 새 줄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었다. 열매도 많이 열리지만, 대부분은 주먹만큼도 자라기 전에 시들어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8월에 들어서는 애호박을 따 먹기 시작했다. 호박꽃은 꽃봉오리가 맺을 때, 꽃만 피는 수꽃과 열매를 꽃 아래 같이 맺는 암꽃으로 구분되어 핀다.

제대로 자랄 것으로 생각지도 않고 그냥 호기심으로 남겨 둔 호박 싹 하나가 이런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거름을 주는 등 미리 흙구덩이를 준비해서 심은 호박 못지않게, 오히려 그보다 더 잘 자라나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각별했다.

요즘은 뒤뜰의 호박보다 훨씬 더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열매도 더욱 많이 맺히고 있고, 줄기들도 계속 왕성하게 자라나 대문 쪽 담장으로 타고 올라가 담장을 덮기 시작했다. 180㎝ 높이의 방부목 담장이고 넝쿨손이 움켜쥘 만한 것이 없어, 옆의 다른 넝쿨손이나 줄기를 서로 잡고 버티며 담장 위로 향하다가 함께 무너져 내리곤 했다. 그래서 한 군데에 버팀목을 두 개 세워놓았더니 그것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서도 안정적으로 자라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어떻게 진행될 지도 궁금하다.

일찍 맺힌 열매 중 하나는 따 먹지 않고 익히려고 두었었다. 잘 크고 누렇게 익기 시작한다 싶었는데 1주일 전 확인해보니 물러져 버렸다. 전체적으로는 지금도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열매가 대충 세어보아도 20개 이상 눈에 들어오고 있다. 호박의 생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호박, 한국인에 채소 이상 의미

우리 삶의 희로애락 함께하며

다양한 문화적 상징 깃들어 있어

잘익은 호박만 봐도 마음이 푸근


◇오랑케 나라에서 들어온 박

호박 열매는 덜 자란 애호박과 완전히 자라 익은 늙은호박 모두를 먹는다. 품종에 따라 애호박을 이용하는 품종이 있고, 늙은호박을 이용하는 품종이 있다. 옛날 시골에서는 둘 다 가능한 품종을 대부분 재배했다. 덩굴식물인 호박은 씨앗을 심어 놓으면 잘 자라는 편이고, 호박 열매는 수확하고 나서도 오래 저장이 가능해서 비축해 두고 먹기에도 매우 좋아, 과거 시골에서는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한국에서 재배하는 호박은 크게 3가지 종류라고 한다. 중앙아메리카·멕시코남부 원산의 동양계 호박, 남아메리카 원산의 서양계 호박, 멕시코 북부 원산의 페포계 호박이 있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박이란 의미로 오랑캐 ‘호(胡)’ 자를 써서 ‘호박’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호박은 중국 만주 지역에서 처음 전래되어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박은 열매는 물론, 그 씨와 잎도 먹는다. 호박잎은 보통 쪄서 쌈을 싸먹을 때 사용한다. 잎에 털이 많아서 까끌까끌한 느낌이 강하지만 익히면 달달한 특유의 풍미가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호박잎을 좋아해 수시로 우리 집에 와서 수시로 호박잎을 따가곤 한다. 물론 이야기하고 따 가는데, 그 보답으로 쌀이나 빵 등을 가져와 주곤 한다. 나도 어릴 적 맛있게 먹던 기억이 있어, 어린 호박잎을 삶아 된장국과 함께 밥을 싸먹곤 한다.

‘맷돌호박’이라고도 불리는 동양계 호박의 늙은호박은 우리가 예전부터 흔히 보아온 둥글넓적한 호박으로, 호박죽이나 호박전에 주로 사용된다. 주름이 많고 노란빛의 껍질을 가진 이 늙은호박은 옛날 시골과 인연인 있는 이들에게는 많은 추억이 담긴 존재일 것이다.

애호박이나 늙은호박은 다양한 음식 재료로 활용된다. 찌개나 국, 전, 떡은 물론이고, 늙은 호박으로 김치를 만드는 지역도 있다. 서양에서도 수프나 스튜, 파이 같은 음식의 재료로 자주 쓰인다.

늙은호박을 주재료로 활용한 호박범벅은 추억과 정이 담긴 영혼의 음식인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다. 호박범벅과 호박떡, 호박전 등 누렇게 잘 익은 호박을 이용한 음식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필자에게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시절의 한국인에게 호박은 단순한 채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동안 삶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며 다양한 문화적 상징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라는 호박 관련 대표적 속담이 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큰 행운을 얻었을 때 사용한다. 옛날에는 호박이 소중하고 넉넉한 먹을거리였고, 크고 잘 익은 호박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큰 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고향 시골의 집집마다 호박을 심지 않는 집이 없었다. 여름 내내 호박 열매나 잎으로 다양한 음식을 해먹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수확해 호박떡, 호박범벅을 해서 서로 나눠먹었다. 이런 정서 속에 자란 이들은 누렇게 잘 익은 호박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질 것이다. 누렇게 잘 읽은 호박이 여기 저기 있는 가을의 마당 풍경을 미리 떠올려본다. 호박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흙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호박 한 포기다. 내년에는 같은 장소에 일부러 호박 씨 하나를 심어볼까 한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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