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아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번호표를 뽑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간호사 한 분이 반갑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름이 저랑 똑같네요! 너무 반가워요.”

처음 만난 사이였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공간에서 따뜻한 인사를 받으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분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절하게 검사 순서를 안내해 주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일부러 찾아와 “조심히 가세요.”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그 짧은 만남이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겼다.

낯선 이의 순수한 친절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준다. 계산적인 관계에 지쳐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을 때, 대가 없는 친절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따스한 빛을 비춘다. 한파 속에서 언 손을 녹여주는 따뜻한 핫팩처럼, 우리를 얼어붙게 했던 상처를 어루만지고 배려라는 새살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우리가 낯선 곳에서 만나는 친절을 통해 얻는 깊은 감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에서는 익숙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간적인 연결의 소중함을 여행지에서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처럼, 낯선 이의 친절은 우리 삶의 방향을 비추는 나침반이 된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쓴 시 ‘고독한 구름처럼 나는 떠돌았네’에 등장하는 수선화의 무리가 시인에게 깊은 기쁨을 주었듯, 낯선 이의 작은 친절은 우리 내면에 숨어있던 기쁨과 가치를 일깨우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 삶의 굽이마다 숨어있는 작은 보석과 같다. 이 보석들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관계의 소중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질 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활짝 피워내는 꽃과 같다. 이름이 불리고 존중받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된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계산하고 저울질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가끔씩 겪게 되는 낯선 이의 순수한 친절은 그 모든 계산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들의 행동은 특별한 의도 없이 오직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무심코 건넨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은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며 삶의 등불이 되어준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건네는 작은 친절이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그를 활짝 피어나는 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차가워질 때마다 우리를 지탱해 주는 따뜻한 힘이 아닐까. 겉모습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꽃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대구교대대구부설초 교사 이수진
저작권자 © 대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