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대한민국 외교의 무게를 다시 한번 더 일깨워줬다.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반도체와 배터리, 조선과 방산분야의 선두주자로, 국제정치학상으로는 전략적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 같은 중요 의제들의 선택적 파트너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 외교는 우리의 산업과 일자리, 지역의 미래와 직결된다. 외교가 곧 경제이고, 외교가 곧 민생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 정상회담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시아·태평양 21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각국의 최고 정상들이 모여 향후 세계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눌 것으로 기대된다.
APEC의 의제는 단순한 선언이 아닌 미래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이다. 글로벌 공급망 협력, 디지털 전환, 에너지 안보, 기후 대응 같은 거대한 주제는 경북의 산업과도 맞닿아 있다.
포항의 2차전지와 수소 산업, 구미의 첨단 전자와 반도체 부품, 안동의 백신·바이오 클러스터 등 모두가 APEC이 다루는 핵심 어젠다와 연결된다. 세계적 담론과 지역 전략이 겹쳐지는 순간, 지방은 더 이상 국제 흐름과는 상관없는 들러리가 아니라 글로벌 협력의 최전선이 된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닌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열린다는 점은 상징성은 더 크다. 2005년 부산 회의 이후 20년 만에 우리나라가 다시 의장국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지방 도시가 중심 무대가 된다는 점은 더 각별하다. 정상회의는 10월 27일 고위관리회의로 시작해 외교·통상 각료회의와 기업인 대화를 거쳐,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이틀 동안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정상회의로 마무리된다. 이 기간은 곧 ‘세계가 경주로 모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경주는 그 자체로 세계인에게 매력적인 도시다.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동아시아 문명의 상징이고, 보문관광단지와 황리단길은 현대적 매력을 더한다. 국제회의와 관광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반 인프라는 충분하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경주는 단순한 개최지를 넘어 세계인이 찾는 MICE·관광 복합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천년 전 신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세계와 소통했다. 당나라와 일본, 아랍 상인들과 교류하며 개방적 문화를 꽃피웠던 그 도시에서, 이제는 아시아·태평양 21개국 정상들이 모여 21세기 미래를 논의하게 된다. 과거 신라가 그랬듯, 경주는 다시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 될 수 있다. 한류와 K-컬처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지금, 경주 APEC은 한국 문화의 뿌리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무대다. 각국 정상들이 불국사 대웅전에서 느끼는 경건한 감동과 황리단길에서 체험하는 젊은 한국의 활력이 교차할 때, 그것은 단순한 관광 체험이 아니라 한국과 경북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전통이 K-컬처로 꽃피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일찌감치 경주에 상주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챙기고, 모든 역량을 APEC 성공에 쏟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경북도는 인파 안전 특별대책 기간을 정하고 교통·숙박·의전 준비에 착수했다. 지진·해일 대피소 점검, 실시간 인파 밀집도 모니터링, 긴급 대응 훈련까지 빈틈없는 대비가 이어지고 있다. 경북과 경주의 명예가 세계의 눈앞에 서는 만큼 철저한 준비는 당연하다. 더불어 APEC의 진정한 성공을 결정짓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호응 또한 뜨겁다. 자원봉사자 모집에 예상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상인들도 외국어 간판 설치와 서비스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경주시는 시민 대상 기본 외국어 교육과 문화 에티켓 프로그램도 운영하며, 민관이 함께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각국 정상과 참가자들이 경주에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이 곧 대한민국과 경북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국가 외교의 품격은 결국 생활 속 작은 디테일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이번 APEC은 바로 그런 점에서 경주시민 모두가 외교관이 되는 자리다.
외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산업이고, 지역의 일자리이며, 삶의 질이다. 한미 정상회담이 보여준 교훈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담은 그 교훈을 실천으로 옮기는 무대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 경북과 경주가 이번 기회를 단순한 외교 이벤트로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벌 네트워크와 산업, 문화, 시민의 역량을 세계와 연결하는 전환점으로 만들어낸다면, 이번 APEC은 대한민국과 경북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상만 경북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