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대구시 의사회 부회장, 대경영상의학과 원장

오래된 역사 이야기 한 자락을 해볼까 한다. 1,400년 전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정착한다. 그가 전한 선진 문물이 일본의 자랑인 다타라 제철법이다. 또한 그는 백제계 귀족 가문인 다타라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후일 다타라 씨족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서일본을 제패한 명문거족 오오우치 가문이 된다. 오오우치 가문은 전통적인 제철 기술과 중국 및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부를 결합하여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서며 내분이 일어나서 세력이 쇠퇴하게 되고, 전국시대를 거치며 모리 가문에게 영지를 흡수당하고 그 명맥만 남게 된다.

오오우치에서 분가(分家)된 요시미 가문은 오오우치 가문의 방계 혈족이며 서북쪽 국경을 수호하는 핵심 가신으로 오오우치 가문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오오우치 가문의 딸과 혼인을 맺을 만큼 두 가문은 매우 가까웠다. 오오우치 가문이 모리 가문에게 서일본의 패권을 넘겨준 후에도, 요시미 가문은 모리 가문의 휘하에서 명문 무가로 남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자, 요시미 가문은 모리 가문과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전쟁 중 요시미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들이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면서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요시미 가문의 본가 세력이 약해지자, 일부 방계 혈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성을 바꾸어 생활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미즈마 가문이다. 삼백 년의 시간이 흐른 일제강점기 시절, 미즈마 가문의 후손 중 일부가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하는 등 조선에서 활동하게 되어 한국과의 천 여년의 긴 인연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백 년이 흐른 2025년 9월, 미즈마 가문의 후손이 방한하였다. 내과 의사인 미즈마 요시히로 효고현보험의협회 국제부장이 대구광역시 의사회 주최의 종합학술대회에 강사로 초청받아 대구를 방문한 것이다. 미즈마 가문과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깊이 인식하고 있던 그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조부가 근무했던 조선식산은행 건물(현 대구근대역사관)을 방문하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으로 조선을 공격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일본명 沙也可)을 모신 녹동서원 과 달성 한일 우호관, 3·1운동 계단, 이상화 고택, 국채보상공원 등을 둘러보며 한일 간의 근현대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제 임성태자로부터 시작되어 다타라 씨족, 오오우치 가문, 요시미 가문, 미즈마 가문으로 연결된 이야기는 단순히 유력 가문들의 흥망성쇠를 넘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한일의 인적 교류는 단순한 혈통 관계를 넘어 양국 문화의 뿌리를 잇는 중요한 역사이며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이처럼 오랜 교류의 역사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한일 양국 관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국과 일본은 교류와 갈등이 뒤섞인 장구한 역사 속에서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미래 또한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양국의 공동 번영을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정부 간의 공식 외교는 양국 관계의 기본 틀을 형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진정한 우호는 국민 개개인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민간 교류는 정치적, 외교적 이슈에 얽매이지 않고 편견을 허물며 신뢰를 쌓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대구광역시 의사회가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해외교류사업도 이러한 민간 교류의 일환이다. 재일한국의사회, 고베시의사회, 효고현 보험의협과 COVID19 대응, 의대증원 등의 의료정책, 고령화 사회에 따른 치매와 만성질환관리, 재택방문진료 등의 다양한 의학 정보 공유와 상호 방문을 통한 인적교류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이웃으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정치적, 역사적 문제가 양국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마다, 굳건한 민간 교류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될 것이다. 대구광역시 의사회의 사례처럼, 민간 영역의 교류가 다양한 형태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일본내 지한파의 ‘연한대중(聯韓對中, 한일이 손잡고 중국을 상대함)’같은 거창한 시대적 담론만 주목할 일이 아니라, K팝, K드라마 등의 한류 콘텐츠,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닌텐도 같은 게임의 유행 또한 크게 반기고 키워 나가야 할 좋은 흐름이다. 한일 양국의 진정한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답, 바로 민간교류이다.

김경호 대구시 의사회 부회장, 대경영상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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