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난 몇 달간 대구 곳곳을 돌며 만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첫마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잃은 예비부부, 전세보증금을 잃고 타지를 전전하는 청년, 전재산과 첫 보금자리를 잃은 사회초년생까지. 피해자들의 얼굴과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불안과 절망이 서린 눈빛만큼은 닮아 있었다. 그들에게 집은 한순간에 ‘빚’으로 둔갑한 공간이 됐다. 피해자들의 한숨에는 무너진 일상과 끊어진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며 전세사기 특별법을 마련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여전히 “제도가 삶을 지탱해주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수천건의 피해 접수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인정 절차와 모호한 기준 탓에 절반 이상이 ‘비(非)피해자’로 남아 있다. 같은 건물에서 똑같이 피해를 당해도 누구는 인정받고 누구는 탈락하는 기막힌 현실이 반복된다.
피해자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거창한 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도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조차 들어주지 못했다. 피해자 스스로가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구조 때문이었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조직적으로 허점을 파고들지만 피해자는 홀로 증거를 모으고 복잡한 절차를 감당해야 하는 불공정한 싸움에 내몰린다.
대한변호사협회 이사인 천주현 변호사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며 “특별법 속에 별도의 ‘전세사기죄’를 신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지금처럼 민사상 피해 구제 절차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험사기나 교통사고 범죄처럼 독립된 범죄 유형을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세사기죄가 신설되면 구성 요건을 보다 명확히 하고 가중처벌 조항을 둬야 한다”며 “이는 범죄 억지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피해자 입증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제도적 보완책도 필요하다.
이병홍 대구과학대 금융부동산과 교수는 “피해자에게 임대인의 정보를 제한적으로라도 공개해 입증을 돕거나 임차인이 계약 전 임대인의 세금 체납 여부·선순위 채무 현황 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단순한 피해 구제가 아니라 새로운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마련돼야 한다는 의미다.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별법의 기간 연장이 아니라 제도의 허점을 근본적으로 메우는 대책이 절실하다. 피해자 구제는 뒤따라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의 틀을 세우는 일이다. ‘집’이 ‘빚’으로 바뀌는 악몽이 더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유채현 기자 ych@idaeg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