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원 ㈜데씨제 대표, 인간공학 박사

최근 발생한 전산망 마비 사태는 단순한 시스템 장애로 치부하기에는 파장이 너무 컸다. 금융거래가 중단되고, 공공행정 서비스가 멈추었으며, 교통과 물류까지 혼란을 겪었다. 하루아침에 편리함의 그림자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매일 디지털 기술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지만, 그 토대가 얼마나 허술한지 이번 사건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문제의 본질은 기술적 결함보다 구조적 대비 부족에 있다. 어느 사회든 기술적 장애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사회 전체의 마비로 이어지는 것은, 준비와 책임 체계가 부재했음을 의미한다.

첫째, 전산망 안정성은 단순히 IT 부서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다. 우리는 사이버 공격이나 단순한 오류 하나가 금융시장과 행정 체계, 나아가 정치적 혼란까지 불러올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인프라는 국가의 혈관과 같다. 혈관이 막히면 신체가 마비되듯, 네트워크가 멈추면 사회 전체가 정지한다. 이번 사태는 사이버 안보를 선택적 투자가 아닌 생존 조건으로 다루어야 함을 보여준다. 미국이나 유럽 주요국은 이미 디지털 인프라를 국가 방위 개념에 포함해 관리한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민간 기업의 관리 역량과 정부의 뒷북 대응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위기 대응 시스템의 부재가 드러났다.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이라도 100% 완벽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장애가 발생했을 때 얼마나 빠르게 복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대체 경로를 가동할 수 있는지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정부와 기업은 서로 책임을 미루며 시간을 허비했다. 이용자들은 원인과 복구 시점을 알지 못한 채 불안에 떨었다. 위기 관리의 핵심은 투명성과 속도다. 이번 사건은 양쪽 모두에서 실패했다. 시스템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신뢰까지 무너지는 것은 복구 불가능한 손실이다.

셋째, 책임 구조가 모호하다. 전산망이 마비되면 원인을 찾기보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두고 공방이 벌어진다. 정부는 민간 기업의 관리 부실을 지적하고, 기업은 정부 규제와 과도한 비용 부담을 탓한다. 그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이용자들의 몫이 된다.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전산망 마비 같은 대규모 사태는 특정 주체의 잘못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설계하고, 함께 대비하며, 함께 책임지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넷째, 디지털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리스크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터넷 뱅킹이 중단되면 현금 한 장 꺼내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행정 서비스가 멈추면 기본적인 증명서 발급조차 불가능하다. 이번 사태는 디지털 전환의 역설을 드러낸다. 편리함이 극대화될수록 불편함의 충격도 커진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백업 체계와 오프라인 대응 능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모든 시스템을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만든 뒤, 비상시에는 손발이 묶이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국제 경쟁 환경 속에서 우리의 대응 수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사이버 복원력(resilience)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보안 강화가 아니라, 장애 이후 빠른 회복 능력을 제도화하고 훈련한다. 모의 훈련과 시뮬레이션은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사고가 터진 뒤에야 대책을 내놓는 후진적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대규모 예산 투입과 전산망 이중화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는 사건 이후의 땜질일 뿐이다. 핵심은 사전 예방과 상시 훈련이다. 사고가 터지면 책임자를 문책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번 전산망 마비 사태는 한국 사회가 디지털 선진국이라는 자부심 뒤에 감추어둔 허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불안정성도 떠안고 있다. 진정한 디지털 강국은 빠른 인터넷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 위에 세워진다. 정부와 기업은 이번 사건을 일회성 해프닝으로 넘기지 말고, 국가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국민 역시 불편을 학습의 계기로 삼고, 안전망 구축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전산망 마비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술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신뢰를 지키는 사회만이 위기에서 더 강해질 수 있다. 이번 사건이 단순한 불편으로 잊히지 않고, 한국 사회가 더 탄탄한 디지털 기반을 세우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충원 ㈜데씨제 대표, 인간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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