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 3성 박·석·김 가운데
탈해왕은 첫 석씨의 ‘4대 왕’
62세 즉위 후 24년만에 승하
봉분 높이 4.5m 지름 14.3m
아무런 장식 없어 편안한 모습

올해 가을에는 비가 유난히 자주 오고 많이 내렸다. 여름에는 태풍이나 장마도 없다시피 했고, 보기 드문 더위에다 오히려 가뭄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더니 가을 초반에는 비가 너무 잦고, 햇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 날이 계속되던 지난달 23일 경주로 훌쩍 떠났다.
그날도 흐리고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여서, 기분도 전환할 겸 가까운 경주에 가서 왕릉을 산보하고 친한 스님을 찾아가서 맛있는 차도 한 잔 할 생각을 하며 대구를 떠났다. 가서 홀로 한가하게 둘러본 곳은 경주 소금강산(167m) 자락에 있는 백률사와 표암, 탈해왕릉이다. 경주시내 북쪽 동천동에 있다. 다행히 이곳들을 둘러볼 때는 비도 거의 오지 않았고, 마침 명상센터(아란야)를 운영하는 스님도 만날 수 있어 아주 맛있는 보이차도 마실 수 있었다. 덕분에 생각대로의 경주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꿈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신비한 일, 아득한 옛날부터 전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서려있는 유적들이라 상상의 날개도 펼치며 한가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백률사와 표암
백률사는 볼 일도 있어 먼저 들렀다. 이 사찰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돼 국가종교로 자리 잡게 된 사건인 이차돈 순교와 관련 있는 절이다. 이차돈이 순교를 당할 당시 잘린 목이 날아가 떨어진 곳이 바로 이곳 소금강산 자락이었다.
이차돈이 처형 직전 “부처님이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이 베어지자 붉은 피 대신 흰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으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꽃비가 내렸다. 베어진 목은 날아가 소금강산 중턱에 떨어졌다. 이 일이 있자 왕과 군신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했다. 그때 이차돈의 나이는 26세였다. 이차돈의 아내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차돈의 목이 베여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를 지었다고 한다. 백률사는 이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백률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후에 다시 지었으며, 기단부 일부는 신라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과거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불국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 세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로 알려져 있다. 백률사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순교비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차돈 순교비는 육각 돌기둥에 이차돈의 순교 내력을 밝히고, 순교 당시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해 새겼다. 현재 백률사 범종각에 걸린 범종(1985년)에도 이 이차돈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다.
백률사 가는 길옆에 있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도 특별한 볼거리다. 백률사에서 130m 정도 떨어져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데, 하나의 큰 바위 네 면에 여러 불상과 보살상이 조각돼 있다. 불상을 조각해 만든 것도 있고, 돋을새김 또는 선각으로 새겨 놓은 것도 있다. 따로 떨어져 있는 불상도 있다. 사면불상 주위에는 초석이 몇 개 보이는데, 1985년 발굴조사에서 사면불 주위로 고려시대 건물터가 확인되고 사면불을 감싸는 목조가구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표암과 탈해왕릉은 백률사 부근에 있다. 소금강산 능선을 따라 내려가도 되고, 백률사 아래에서 평지 길을 따라 갈 수도 있다.
표암(瓢巖)이란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한다. 박바위는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기에 불린 이름이도,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B·C 69년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으며, 그 후 B·C 57년 신라가 건국되었다. 이처럼 표암은 경주이씨 혈맥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화백(和白)이라는 민주정치제도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표암 위에는 타원형의 홈이 파진 바위인 석혈(石穴)이 광림대(光臨臺)라는 비각 안에 있는데, 이 석혈은 알평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목욕한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 표암 유허비도 있다.
표암 아래에는 표암을 기리는 표암전과 알평 사당인 악강묘(嶽降廟), 경주이씨 화수회 건물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탈해왕릉
표암전 바로 옆에 솔숲이 멋진 탈행왕릉이 있다. 신라 왕실의 3성(姓)인 박씨·석씨·김씨 가운데 첫 석씨 왕인 제4대 탈해왕(재위 기간 57~80). 탈해는 본래 외국(다파나국) 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가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버리려 하자 왕비가 비단으로 알을 싸고 상자에 담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붉은 용이 이를 호위하였다. 이윽고 계림 동쪽 아진포구에 이르렀다. 이 때 까치들이 우짖으면서 따라왔고 그 소리를 듣고 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까치 ‘작(鵲)’ 자에서 ‘조(鳥)’ 자를 떼어내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상자인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탈해는 남해왕(재위 4~24)의 사위가 되었고, 유리왕의 뒤를 이어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가야국을 찾아가 수로왕과 내기를 했다거나 기묘한 꾀를 내어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았다는 등의 설화가 전해 온다.
탈해왕릉은 소금강산의 끝자락 평지에 자리하고 있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봉분 주위가 넓고 아무런 장식 조각들이 없어 매우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인데, 봉분은 높이가 4.5m, 지름이 14.3m라고 한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탈해왕릉이라는 작은 표석 두 개가 무덤 앞에 서 있다. 왕릉 옆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 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신라 석씨 왕은 8명이다. 탈해왕은 죽은 후 신으로 숭배되는데, 동악신·동악대왕으로 신격화되었다. 동악은 동쪽의 산으로, 탈해왕의 신사가 토함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어느 날 문무왕의 꿈에 탈해왕이 나타나 내 뼈를 파내 조각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했고, 문무왕이 토함산에 탈해신전을 지어 안치했다고 한다.
최근 유골 뿌리는 산골장 합법화
왕릉 형태의 공공산골장 지어
시민공원으로 가꾸어 나간다면
훨씬 더 사랑을 받지 않을까
탈해왕릉과 그 주변 숲을 보면서, 이런 왕릉 형태의 산골장을 곳곳에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장묘 방식 중 하나로 최근 유골 가루를 뿌려 처리하는 산골장이 합법화되었고, 이 산골장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날 것이다. 산골장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의 하나로 이런 왕릉형태의 공공 산골장을 만들어 나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봉분은 그 안에 시신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유골이 뿌려진 곳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이고, 봉분과 그 주위에 넓게 조성한 잔디밭에 유골을 뿌리는 것이다. 주위에는 나무나 화초 등을 심어 가꾸면 될 것이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장묘공간으로 사용하고, 또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작은 공원으로 가꾸어 가면 사랑받는 추모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도심이나 도시 주변 곳곳에 지자체가 나서 이런 장묘공원을 마련해가면 장례 문제 해결 방법도 되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며 자신의 조상 혼백이 있는 공간인 만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일반 시민들도 각별한 마음으로 그 공간을 대하고 관리할 것이다.
이런 왕릉식 장묘공원에 시민들의 유골이 계속 뿌려지면서 주민들은 대를 이어가며 자신의 조상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가꿔갈 것이다. 이런 차별 없는 무덤을 공유하면서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이 되고, 환경파괴나 오염 등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조잡한 조각작품이나 기념물들이 있는 공원보다 훨씬 더 사랑을 받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