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닉슨 독트린’·주한 미군 철수 계획
안보 위기에 “싸우면서 건설하자” 구호
4대 핵심 중공업 육성 무기산업과 연계
3차 번개사업 이후 ‘국산 병기 개발 시대’

◇방위산업 태동의 배경
1968년 1월 21일 밤,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이른바 1·21 사태다. 무장공비들은 비무장지대를 넘어 서울 종로 자하문 고개까지 침투했다.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신분을 묻자 그를 사살한 후, 시내버스에 총을 쏘며 수류탄을 던졌다. 군경 합동작전 끝에 28명 사살, 2명 월북, 그리고 김신조는 생포됐다.
불과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발생했다. 승무원 83명을 태운 미 군함이 원산 인근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된 것이다. 이어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북한은 울진·삼척 지역에 무장공비를 세 차례나 침투시켰고, 1969년에는 미 정찰기 EC-121 격추 사건까지 일으켰다. 한반도는 전면전의 긴장감으로 요동쳤다.
1970년 2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외교교서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핵전쟁의 위협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내란이나 침략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즉, “이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스스로 책임지라”는 선언이었다.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의 전략이었지만, 한국의 경우 동맹국 신뢰의 균열로 다가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사건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북한의 사과나 배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국의 방위 공약에 회의를 느끼면서 방위산업의 조속한 발전 없이는 국가 안보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가 등장했고,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의 씨앗이 동시에 뿌려졌다.
◇안보위기 속의 방위산업 구상
이처럼 안보 위협을 느낀 정부는 ‘선 경제개발 후 자주국방’이라는 기존 노선을 수정했다. 자주국방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군 현대화를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했다. 그 목표에는 전차 증강, 미사일 인수, 전투기 및 소총 교체, 무기 생산공장 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8년 창설된 향토예비군은 자주국방 체제를 뒷받침했다. 정부는 예비군 무장을 위한 탄약과 장비, 비축용 물자를 자체 생산하기로 했다.
그 무렵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산업 정책의 방향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경공업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공부의 시각을 우려하며, 보다 근본적인 산업구조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김 부총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김재관 박사에게 중공업 육성 계획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김 박사는 미국 터프츠대 해리 최(Harry Choi) 교수를 총책임자로, 이경서·남준우·김훈철 박사 등과 함께 비밀특별작업반을 구성했다. 그 결과 1970년 5월, 「한국 기계공업 육성 보고서」가 완성됐다. 이 보고서는 주물선공장·특수강공장·중기계공장·대형조선소 등 4대 핵심 중공업 육성을 기획하고 이에 대한 실행계획을 제안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1970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국방과학기술 연구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연구기관 설립을 지시했다. 6월 청와대 회의에서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이 결정되고, 8월 6일 공식 발족했다. 초대 소장은 신응균 예비역 준장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정부기관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특수법인체로 창설되어 행정적 제약을 피했다. 정래혁 국방부장관은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을 마련했고, 필요한 병기 생산시설에 전수 조사를 실시했다. 2대 소장으로 부임한 심문택 박사는 무기 개발의 중책을 김재관 박사에게 맡겼다. 그는 철강·기계·소재를 아우르는 전문가로, KIST에서 기획했던 산업구조를 방위산업과 접목시켰다. 김 박사는 대통령의 기대대로 자신이 KIST에서 기획한 4대 핵심공장 산업을 무기산업과 연계하여 개발함으로써 국방산업을 성공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국방의 초석”이라는 글귀가 음각된 기념비가 2개 있다. 이는 무기체계 개발과 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완수에 기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문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연구소에 하사한 친필 휘호다.
◇번개사업-국산 병기의 첫 걸음
1971년 11월 9일, 경제기획원은 방위산업 건설 현황을 보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국산 병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번개사업’이다. 1차 번개사업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 로켓발사기, 지뢰, 수류탄 등 기본 병기를 대상으로 했다. 연구진은 외국 병기를 분해해 부품을 스케치하고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로 시제품을 완성했다.
국산 병기 1차 시제품 8종은 12월 16일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2월 24일 해운대 탄약창에서 3.5인치 로켓포를 시험 사격한 결과 대성공이었다. 카빈 소총은 태릉 육군 사격장에서 실시한 시범 사격에서 미제보다 더 좋은 명중률을 보였다. 수류탄과 지뢰 등 기타 시제품들도 아무 이상 없이 작동했다.
박 대통령은 즉시 2차 번개사업을 지시했다. 2차 번개사업은 1차와 같은 품목에 불량 부품을 수정·보완하여 수량을 늘리는 작업이었다. 미 국무부는 클라이드 하딘이 이끄는 기술지원단을 파견하여 각 병기에 대한 도면 및 기술자료뿐만 아니라 시제품 기술시험평가도 지원했다.
1972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각군 총장, 언론기관, 시제 업체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 보병 26사단에서 벌어진 2차 시제품 시사회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거뒀다. 이어 3차 번개사업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4월 1일부터 6월 말까지 수행하였고, 9월에는 시제품을 보완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이로써 국산 병기 개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 정책 의지
1973년 1월 31일, 청와대 지하 병기진열실에서 장장 4시간에 걸친 회의가 열렸다. 이렇게 좁은 방에 큰 의자 3개와 소형 간이의자를 놓은 채 국무회의 격인 큰 회의가 개최된 예는 전무후무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를 비롯한 각료, 참모,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장 등이 참석했다. 오원철 경제 제2수석이 ‘중화학공업 발전안’과 ‘방위산업 육성안’을 주제로 브리핑했다.
참석자들은 청와대 안에 병기진열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전시된 국산병기의 종류를 보고 놀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방부 일각에서는 국산병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방위산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부로 느꼈다.
박 대통령은 브리핑을 다 들은 후 묵묵히 병기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 수석, 돈은 얼마나 들겠소?” “내외자 합쳐 100억 달러쯤 됩니다.” “남 재무, 낼 수 있겠소?” 바로 뒷줄에 있는 남덕우 장관은 “액수가 커서 …”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브리핑을 맡았던 오원철 수석은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박 대통령의 짧은 네 문장의 말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전쟁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라면서도 계속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 주었다.”, “태평양 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 주어서야 되나.”
그리고 김종필 총리에게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구성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외자도입을 지시하였다. 그 순간 방위산업은 경제개발의 부속이 아니라, 국가 생존전략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율곡사업과 백곰 미사일
1973년 4월,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전략 수립을 지시했다. 이병형 합참본부장이 주도하고, 임동원 대령이 실무를 맡은 합동기본군사전략이 마련됐다. 이를 토대로 1974년부터 율곡사업이 시작됐다. 율곡사업은 방위력 증강과 병기 현대화를 위한 10년 계획으로, 1975년에는 방위세법이 제정되어 재원을 확보했다. 총 규모는 38억4천500만 달러에 달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총 161억3천만여 원의 방위성금을 모았다. 이 기금이 율곡사업의 재원이 되었다. 베트남 패망 3달 후, 1975년 7월 16일 정부는 율곡 사업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을 위해 방위세를 도입했다. 베트남 패망에 따라 안보 위협 의식이 가중되고, 물가 상승과 당시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데 대한 보완장치였다. 방위세법은 율곡사업의 안정적인 추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결과 국방과학연구소는 한국 최초의 유도탄 개발에 착수했다. 최형섭 소장이 삼고초려하여 영입한 미사일 전문가 이경서 박사가 귀국해 ‘백곰 미사일’ 개발을 이끌었다. 1978년 4월 11일 백곰 미사일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몇차례 시행착오 끝에 1978년 9월, 8차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국산화율 90%에 달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이 완성되었다. 9월 26일 정부는 세계 일곱 번째 미사일 개발국이라고 선포했다.
충남 서해안 안흥시험장에서 귀빈들을 초청하여 국산 미사일 1호 백곰의 시험발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은 엄청난 불기둥을 내뿜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백곰의 사거리는 180km이다. 소련 국방성은 남한 핵개발을 경고했으며, 미국 카터 정부도 한·미 미사일협약을 강조하면서 7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을 파견하여 기술제공국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한·미 간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은 자주적 군사력 확보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정부와 국민이 세금과 기부금까지 동원해 군사화에 참여했고, 국방기술의 ‘국산화(Koreanization)’ 과정에서 한국 엔지니어들의 창의성과 집념이 빛났다.
방위산업을 ‘국가 생존전략’ 중심으로
1978년 세계 일곱번째 미사일 개발국
곳곳에 공업단지…산업기반·안보 확보
국방-산업-과학 복합 K-Defense 이뤄
◇산업과 국방의 결합
1973년 12월 24일 정부는 ‘공업단지개발육성법’을 공표한 것은 각각 중점 산업이 다른 다섯군데의 공업단지를 추가로 건설하기 위한 강한 법적 토대가 되었다. 여천은 석유화학, 옥포 조선, 구미 전자, 포항 제철, 온산 비철금속이 주요 산업이었다.
특히, 창원기계공단은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실질적인 모태다. 종합기계공업단지로 창원이 선정된 이유는 포항종합체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낙동강 공업용수가 풍부하며, 마산 수출자유지역이 인접해 기술도입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산항의 수심이 깊어 대형선박의 접안이 용이하고 기온이 따뜻하여 온도에 민감한 철강 소재를 중심으로 하는 정밀기계공업단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창원공단의 모델은 일본 히다치였다. 히다치는 모든 기계 종류를 생산하는 종합기계제작회사였기 때문이다. 창원공단은 처음부터 1천500만 평이 넘는 대규모로 기획되었다. 일본의 사전 조사 용역회사도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창원공단과 같은 대규모 종합기계공업단지 조성을 통해 우리나라의 안보 및 산업적 가치를 확보하여 미국이 쉽게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적인 의도였다. 미국은 가치있는 나라는 버리지 않는다. 트럼프와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회담을 본 언론의 “당신은 카드가 없다. 카드가 없으면 협상 못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희 대통령은 창원공단 같은 종합기계공업단지를 통해 산업기반과 안보를 동시에 확보하고자 했다. “가치 있는 나라는 버려지지 않는다”는 신념이었다. 산업화와 국방력을 결합해 한국을 ‘전략적 가치국가’로 만들려는 계산이었다.
◇K-국방의 뿌리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과학연구소의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장이 전격 해임되고 이후 조직개편을 시행하면서 이경서 박사 등 30여명의 핵심 간부급 용원이 퇴직당했다. 1982년 12월에는 800여명의 과학자들이 추가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이 숙청기간 동안 전두환 정권은 한국이 궤도 180km 이상의 유도탄을 개발하지 않을 것을 미국 정부에게 보장했다.
ADD 숙청과 미사일 제한 협약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70년대에 구축된 방위산업 인프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창원·구미·대전의 연구클러스터는 한국형 R&D 체계의 뼈대를 이뤘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8대 무기 수출국이다. 한화, LIG넥스원, 현대 등 방산기업은 세계 100대 방산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 뿌리는 모두 1970년대의 ‘자주국방’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정부는 무기기술 인프라를 전국 산업벨트와 연결해 구축했다. 둘째, 국가의 동원력과 민간기업·기술자의 협업체계를 동시에 작동시켰다. 셋째, 군사력 강화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국방-산업-과학 복합 모델’을 만들어냈다.
한 세대 전의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는 단순한 전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생존의 전략이자, 오늘의 K-Defense를 가능케 한 한국형 근대화의 신념이었다. 이것은 박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관료, 연구원, 군, 기업인, 그리고 국민들이 일치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