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 리앤의원 원장
지난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의료사고 피해자 울분 해소와 형사고소 최소화 방안을 모색하는 국회 토론회’가 열렸다. 해결 방안으로 공적 배상 체계 구축과 반의사불벌죄 범위 확대 등 사법 리스크 완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소송에 의존하지 않는 분쟁해결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다만 필수의료를 무너뜨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의료인에게 부과되는 과도한 사법 리스크는 완화가 아니라 사법 리스크 자체를 없애야 한다. 잊혀질 만하면 나오는 억 단위의 손해배상책임 판결 소식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필수의료 분야에서 고군분투 중인 의료인들의 손과 발뿐만 아니라 환자를 향한 숭고하고 따뜻한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최근 판결이 나온 분당서울대병원 신생아 뇌성마비 사건을 한 예로 살펴보자. 산모는 진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왔고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출산 직후 아기는 태변 흡입과 호흡 곤란 등으로 저체온 요법 치료를 받았으나, 이후 안타깝게도 뇌성마비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산모는 의료진이 과실을 범해 아기가 뇌성마비에 이르도록 만들었다며 소송을 하였다. 재판부는 뇌성마비 발생에 미친 영향 등을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100% 의료진 책임이라 볼 수 없고, 의료진의 과실 자체는 경미한 수준이지만, 뇌 손상이라는 과실의 결과가 중대하다는 이유로 의료진은 산모에게 6억5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료행위의 나쁜 결과가 의료진의 책임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그 결과가 중대하다고 하여 선의의 의료행위를 한 의료인에게 위와 같이 거액의 배상책임을 묻는다면, 특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필수의료 분야에서 어느 누가 선한 의료행위를 헌신적인 마음으로 지속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분만 인프라가 붕괴되고 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경고등은 줄곧 깜빡이고 있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3년 706개였던 분만 가능 의료기관은 강제로 분만기관으로 지정된 기관들까지 포함하여 2023년 463개로 34.4% 감소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지역·안전·응급 분만에 대한 공공정책 수가를 도입하여, 2천382억 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였으나 실제 분만 가능한 병원급 의료기관은 2023년 126곳에서 2024년 115곳으로, 의원급 1차 의료기관은 2023년 203곳에서 2024년 183곳으로 여전히 줄어들고 있다. 이는 의료재정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민의 피땀이 어린 혈세가 의도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낭비되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소중한 의료재정이 정말 필요한 곳에 적절히 사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료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문가와의 소통 없이 탁상공론만으로 그럴듯하게 세워진 계획은 모두 예외 없이 좋지 못한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영어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있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끔찍하게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의대 증원 정책과 필수의료 패키지가 그러하였고, 최근 의정갈등의 새로운 불씨로 거론되고 있는 검체검사 위·수탁제도 개편안, 성분명 처방 강제 입법안 등이 그러하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하고 좋은 법안으로 보이지만 결국 제도가 시행되면 의료 접근성 저하, 건강보험 재정 악화, 국민건강 위협 등 위기의 대한민국 의료를 점점 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악법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다시 한번 촉구한다. 의료 정책 입안자들의 좋은 의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의료인들이 늘 주장해왔듯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의료 전문가의 말을 귀 기울여 전문가의 목소리가 잘 담긴 의료 정책이 수립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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