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로 몰리며 뜨거운 관심을 낳았던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회의(APEC)가 최근 막을 내렸다.
우리 정부는 다자외교를 통해 여러 성과를 거두고 경주는 국제회의 도시로서 의미 있는 도약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평화롭게 진행됐던 국제행사 뒷면에선 다른 풍경이 있었다. APEC 기간 경주에선 20여건의 반중(半中)·반미(半美) 집회가 진행됐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성격으로 보자면 진보·보수 성향이 뒤섞인 ‘맞불’ 정치집회였다.
일부 참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찢었고 경주 곳곳에 반중 현수막을 내걸었다. 소수의 참가자들이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모습은 한국을 방문한 외신 기자들로부터 각국으로 보도됐다. 국가 정상들을 한국으로 대거 초대한 외교무대에서 정치집회가 변질된 것이다. 선거철이 임박해 오거나 정치 싸움의 양극화가 필요할 때 이같은 프레임이 자주 보인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계기로 전국민적 반일 정서가 팽배했었고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선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발발된 ‘광우병’ 논란이 크게 일었다. 가장 최근에는 2023년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으로 한때 수산시장 상권이 휘청이기도 했다.
반일·반미, 반중·반북 프레임은 각 정치 진영의 색을 대변하거나 혹은 방패막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인식된다. 보수 성향의 시민들은 반중·반북을 외치고 진보 성향 시민들은 반일·반미를 외친다. SNS에서도 양 집단의 집회 영상이 번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 논란인 ‘짱깨 북괴 꺼져라’는 가사를 담은 ‘짱북송’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여당이 최근 ‘형법일부 개정 법률안’을 내놓으면서 ‘반중집회’가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개정안은 특정 국가와 국민을 모욕하면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허위 사실을 적시해 특정 국가, 국민, 인종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최대 징역 5년, 자격정지 10년, 벌금 1천만원 이하로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이 신설된 것이다. 공연히 특정 국가나 국민, 인종을 모욕한 경우 최대 징역 1년 또는 벌금 200만원 이하로 규정됐다.
이를 접한 정치권과 보수단체는 “중국인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국민을 범죄자로 만든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로운 발언을 하지 못하는 거냐”며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 측에선 “중국만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여전히 해당 법이 ‘중국 욕하면 잡혀간다’는 취지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나라의 국기를 찢거나 혐오가 섞인 발언을 할 시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정치성향에서 유발된 국가 감정은 더욱 양극화됐다.
새 정부가 취임한 지 1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 싸움이 ‘국가 혐오’로 변질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과 미국 모두 우리나라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인 만큼 이념 갈라치기가 아닌 우리나라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실질적 경제·외교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자외교 현장에서 거리에서 보인 ‘국가혐오’는 우리나라의 신뢰성을 상실시킬 수 있다.
다만 거리 집회가 시민 정서를 보여주는 큰 힘이 되는 건 사실이다. 국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자 실제 정치적 판단에도 영향을 미친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시에도 시민들의 목소리가 헌법재판소의 판단 근거 중 하나로 작용했다.
‘국가 혐오’ 집회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 특히 청년들의 집회가 눈에 띄는 시점에선 거리로 나선 청년들이 쉽게 범죄자로 낙인찍혀선 안 된다. 물론 이 논리는 반미·반일 집회에서도 적용돼야 한다.
현재 22대 국회에서 국민의힘은 입법권에서의 우위를 잃었다. 의석수가 부족한 탓에 단체 보이콧이 진행돼도 법안은 의석 수 우위를 가진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찬반 논란이 강한 법 입·개정은 우려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국민의 다양한 정서를 헤아리면서 사회적 균형을 지킬 수 있는 입법과 정책이 필요하다.
류예지 정경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