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만 경북본부장

보문단지와 황리단길로 대표되는 경주의 관광지는 본래부터 사람들이 많지만 APEC의 영향으로 더욱 인파로 북적거린다. 황남빵을 파는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선 줄은 대전의 성심당을 방불케 했다. 아시아·태평양 21개국 정상과 CEO, 장관급 인사 6천여 명이 참여한 2025 APEC 정상회의가 경북 경주에서 막을 내린후 경주관광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있다.

경주에서 개최가 확정된 후 세계적인 행사 유치란 기쁨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걱정도 상존했다. 하지만 이번 행사는 경북의 저력과 경주시민들의 수준을 전 세계에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이번 APEC은 대한민국의 외교 성과를 넘어, 지방이 세계 외교의 주체로 나설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무대였다.

짧은 300일 동안 중앙정부, 경북도, 경주시가 한 팀이 되어 완성한 이번 국제회의는 지방정부 역량의 집약체이자 새로운 지방외교 모델로 기록될 것이다. 되볼아보면, 천년고도 경주가 선택된 것은 단순히 역사적 배경 때문만이 아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 있지만 사실 경북은 곳곳에 K-문화, 첨단산업, 전통을 간직한 현대의 도시 이미지를 고루 갖춘 ‘대한민국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환경이 내재되어 있다.

이번 APEC은 경북이 전 세계와 교역했던 통일신라 시대를 이어받아 다시 세계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 역사적인 시간에서 경북이 보여준 첫 장면은 ‘시민이 만든 품격’이었다. 146만 도민이 참여한 범시민 유치운동, 500회에 이르는 환대·친절 교육, 그리고 행사 직전까지 이어진 80차례 현장점검과 100여 개 부대행사 운영은 경북의 저력을 상징한다. 준비는 행정이 했지만 완성은 시민이 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외신 역시 “한국 지방도시가 보여준 조직력과 서비스 품질이 기대 이상이었다”고 평가했다. APEC이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움직인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300일의 기적’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두 번째 장면은 ‘산업·문화·외교의 융합’이었다. 경북은 APEC을 관광행사가 아닌 투자·문화·외교가 결합된 복합 플랫폼으로 설계했다. 신라 문화유산과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야간경관, 첨성대·보문단지 일대의 ICT 전시존, 정상 만찬에 오른 황남빵·천년한우·경북사과 등 K-푸드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북의 농식품 기업들이 직접 참여한 ‘K-푸드 마켓’, 한류콘텐츠를 주제로 한 ‘K-컬처 쇼케이스’, 스타트업과 청년 창업가들이 참여한 ‘APEC 퓨처랩’은 지역의 산업·인재·문화가 동시에 성장하는 새로운 장면을 만들었다. 그 결과는 수치로 증명됐다. 경북도는 이번 회의의 직접 경제효과를 1천780억 원, 생산·고용 유발 등 총 파급효과를 3조 8천억 원으로 추산했다. 이전의 단순 추정보다 정교해진 실증 분석이다. 국제행사가 비용이 아니라 지역경제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번 회의가 남긴 또 하나의 성과는 지방외교의 확장성이다. APEC 기간 중 열렸던 ‘세계 CEO 서밋’에는 다국적 기업 200여 곳이 참가해 에너지·디지털·바이오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경북도는 이를 기반으로 내년까지 글로벌 MICE 도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경주·포항·안동을 잇는 ‘글로벌 컨벤션벨트’ 조성에 나서기로 했다. 이는 단순한 행사 효과를 넘어, 지역균형발전의 새로운 실험으로도 이어진다. 수도권 중심 외교·산업 패러다임을 지방으로 확장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APEC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짧은 기간 동안 경북이 보여준 실험은 단순한 행사 운영이 아니라 ‘지방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질적 답이었다. 이 지사는 “이번 APEC은 경북이 글로벌 외교무대에 다시 서는 전환점이며, K-컬처·K-푸드·K-산업을 결합한 새로운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경북도는 회의 직후 11건의 MOU 체결과 세계 CEO 서밋 후속 협의체 구성, ‘포스트 APEC’ 추진단 가동 등 구체적 실행에 들어갔다.

이제는 새로운 과제가 남았다. 첫째, APEC을 통해 확보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속 가능한 협력체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3조 8천억 원의 파급효과’는 후속 투자와 기업 유치가 현실화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둘째, 경북이 이번에 만든 K-컬처·K-푸드·ICT 융합 모델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도시 산업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시민참여형 도시경쟁력을 꾸준히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APEC 정상회의는 끝났지만, 경북은 다시 시작점에 서 있다. 지방 도시가 세계 외교무대에 오른 전례는 드물지만, 경북은 이번 회의를 통해 “지방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무대를 다시 여는 것이다. 경북이 이번 APEC을 계기로 ‘행사 유치 도시’에서 ‘세계와 연결된 도시’로 전환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대한민국 지방외교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김상만 경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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