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시인

TV속 빈 화면,
언제부터였을까
멈춰버린 시간의 흰자위였을까?

지나간 목소리들은
가장자리로 내려앉아
먼지로 쌓이고

햇살 한 자락
그림자를 쓸어내리며 지나가고

빈 목소리를
더듬더듬 따라간다

현관문은 입을 꽉 다문 채
세상 몇 자락 화면 속으로 구겨 넣고

다리 긴 거미 한 마리 지나간다
가장자리 어둠을 읽어내며


천천히 걸어 나가고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이희승=2023년 ‘계간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해설> 시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한정리 15번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는 있었던 것들이 현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멈춰버린 시간의 흰자위로 남겨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 TV라는 매개물의 등장으로 보아, 빈 화면이란 시인의 심리 상태로 여겨지는바, 분명 무언가 있어야 할 그곳에는 지나간 목소리조차 가장자리로 내려앉아 먼지로 쌓인 상태이다. 멀건 눈만 뜨고 있는 TV 화면을 햇살 한 자락 그림자를 쓸어내리며 지나가고 있고 “빈 목소리를 더듬더듬 따라간다”의 주체는 아마도 시인 일 듯, 문득 예전에 살던 기어 속의 집을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찾아갔을 때의 느낌을 시로 옮겨적은 시로 읽힌다. “현관문은 입을 꽉 다문 채/세상 몇 자락 화면 속으로 구겨 넣고 ”는 인적이 끊긴 상태의 묘사로 보인다. 이 시에서 가장 중심 연은 “다리 긴 거미 한 마리 지나간다/가장자리 어둠을 읽어내며”이 부분이 아닐까. 또한 엄마가 없다는 정황이 왠지 짠하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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