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으로 시작된 웹툰 그리기군
제대 후 구단과 정식 계약
팀 이야기서 도시 이야기로 확장
대구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
가벼운 풍자에 대중들도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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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이야기를 청년의 시선으로 풀어내며 대중과 소통하는 제우준 작가.

 

◇요즘 청년들은 취향으로 ‘고향’을 선택한다

“고향이 어디세요?”이 질문에 청년들은 점점 더 망설인다. 호적상 주소를 말해야 할까, 대학을 다닌 도시를 말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말해야 할까. 학업과 취업을 위해 서너 번 이사를 거듭한 청년들에게 고향은 더 이상 명확한 지리적 좌표가 아니다. 원룸과 고시원, 쉐어하우스를 옮겨 다니며 살아온 청년들에게 “뿌리내린 곳”이라는 고향의 전통적 정의는 더 이상 낯익지 않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고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고향의 의미는 더 선명해지고 있다. 단지 그 정의가 달라졌을 뿐이다. 물리적 장소에서 심리적 안식처로,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의 관계로, 주어진 것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청년들은 혈연이나 지연이 아니라 ‘편안함’과 ‘소속감’을 기준으로 자신만의 고향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취향’이 새로운 고향을 선택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년들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이 열리는 도시나 응원하는 스포츠팀이 있는 지역처럼,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에 마음을 둔다. 자주 찾는 서점이나 카페가 있는 동네에서도 소속감을 찾는다. 그 취향이 환대받는 곳에서 비로소 관계가 생기고 정서적 뿌리가 자란다. 축구팀 하나를 좋아하다가 그 도시 전체를 사랑하게 되고, 한 음악 장르에 빠지다가 그 문화가 숨 쉬는 거리를 고향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좋아하는 곳’과는 다르다. 취향을 매개로 형성된 고향은 그곳에서 자신이 인정받고, 기여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동반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중심으로 일상을 구성할 수 있고, 그 사랑을 나눌 사람들이 있으며, 그 안에서 나의 존재가 의미 있다고 느낄 때, 그곳은 고향이 된다. 청년들은 더 이상 고향을 ‘물려받지’ 않는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를 따라 고향을 ‘선택’한다.

필자가 만난 제우준 작가가 바로 그런 사례다. 구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지금 온 마음으로 대구를 사랑하고 있다. 그에게는 고향이 두 개다. 태어난 곳 구미와 자신이 선택한 곳 대구. 그리고 그 선택의 시작은 단 하나, ‘축구’라는 취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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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람이라면 0.1초 만에 웃고 고개를 끄덕일 순간을 포착한 제반드로의 웹툰 한 장면.

 

취미로 시작 된 일이 직업으로

직업은 도시를 향한 애착으로

도시가 만들어 준 인연 속에서

대구의 시간과 함께 성장해 와

“대구는 나에게 기회의 도시”

◇팬심이 일이 되고, 일이 정주가 되다

2017년, 스무 살의 제우준에게 대구FC는 그저 좋아하는 축구팀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했던 그는 2016년 처음 대구경기장을 찾았다. 그날 본 멋진 골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미디어광고를 전공하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대학생이었던 그는 2017년, 팬심 하나로 대구FC 대외활동에 지원했다. 소정의 활동비를 받으며 팬들의 호응 속에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2018년과 2019년 군 복무로 작업은 잠시 멈췄지만 2020년 제대와 함께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대구FC는 그에게 정식 계약을 제안했다. 그는 “활동비가 아니라 정식 연재비를 받게 되니 그제야 이 일을 조금 더 책임감을 갖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작업의 결이 달라졌다. 취향으로 시작된 일이 한 사람의 직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2022년 8월 그는 사업자등록을 냈고 2023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반과세자로 전환했다. 스물여덟 살의 청년은 어느새 7년차 구단 공식 웹툰 작가가 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업들에서 제안이 왔을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의리도 반이고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대구는 그에게 서울로 갈 필요가 없는 기회를 만들어준 도시였다. 군 복무로 인한 공백을 기다려주었고 청년에게 정식 계약이라는 기회를 내어주었으며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제우준에게 대구는 그렇게 ‘머물 이유가 생기는 도시’가 되었다.

“대구FC를 응원하다 보면 대구시를 응원하게 돼요. 이건 시민들의 것이니까요.” 삼성라이온즈가 ‘최강 삼성’을 외칠 때 대구FC팬들은 ‘최강 대구’를 외친다. 대구FC 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똑같은 옷을 입는다. 내돈내산으로 직접 구입한 유니폼을 입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소리를 내면서 대구경기장에 모여 ‘대구 힘내라’를 외친다. 찐팬들은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애착을 기를 수 있는 팀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것, 그 안에서 연고를 갖게 되고 멘토를 만나게 되는 것. 제우준에게 대구FC는 대구라는 도시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통로였다.

그에게 대구는 기회와 정착의 도시다. 취향으로 시작된 인연이 일이 되었고 일은 다시 이 도시에 대한 애착으로 깊어졌다. 그의 작업은 어느 순간 팀을 그리는 일에서 도시를 기록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대구FC를 따라다니다 보면 사람을 보게 되고 사람을 보다 보면 도시의 결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대구는 놀 거리와 정 붙일 거리가 동시에 많은 도시였다. 그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구의 공감 코드를 찾아가는 작업을 이어갔다.

◇대구를 바라보는 20대의 언어

필자가 제우준 작가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SNS에서 우연히 마주한 ‘대구에 사는 대구’ 캐릭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안에 녹아 있는 스토리에 대한 깊은 공감, 그리고 대구를 바라보는 20대 청년의 애정 어린 시선 때문이었다. 그의 콘텐츠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인스타그램(@je_vandro)에 연재되는 작업에는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애정과 가벼운 풍자가 함께 있었다. 그 솔직한 감각이 더 큰 공감을 만들었다. 그의 채널 구독자는 최근 1만 명을 넘어섰다. “크게 와닿진 않았어요.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기분 좋은 정도?”라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이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폭발적인 바이럴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쌓인 공감과 신뢰의 결과다. 대구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업에 반응했고 그 반응이 모여 1만이라는 숫자가 되었다. 이는 대구라는 도시의 감정과 자기 인식을 정확히 건드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런 작업 방식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2017년쯤엔 구단 공식 만화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있어도 자기 구단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었고요.” 당시는 공식 콘텐츠라면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룰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제우준은 달랐다. 좋아하니까 더 잘 보였고 잘 보이니까 하고 싶은 말도 많아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진짜 팬만이 포착할 수 있는 너스레와 애정 어린 풍자가 그의 작업을 이끌었다. 그 솔직함을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팬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지지했다.

“제가 지금 그리고 있는 ‘대구에 사는 대구’ 캐릭터도 그 연장선이에요.” 구단에서 시작한 그의 감각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확장되었다. 2022년, 경기장 외부에 100미터짜리 선수단 캐리커처 현수막이 걸렸다. 지역의 랜드마크에 자신의 작업물이 게시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실감했다. “순수하게 유머로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도 정식으로 하게 됐구나.” 본인의 정체성도 달라졌다. “저는 웹툰 작가라기보다는 디자이너죠.”

그의 웹툰에는 대구 사람만 아는 감각이 녹아 있다. 동서남북 터미널 이름과 실제 위치가 맞지 않는 도시의 특성을 유머로 풀어내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이는 그 특정 건물은 ‘아, 이제 대구 다 왔다’는 안도감을 주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대구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색과 냄새 같은 감각을 그림으로 옮겼을 때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인근 대학 캠퍼스의 일상을 그렸을 때도 좋았고요.” 제우준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업은 지역을 소비하는 콘텐츠가 아니다.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을 가볍게 스케치하듯 옮기는 방식인데, 그 일상이 대구 시민에게는 곧 공감의 언어가 된다. 아이디어를 억지로 짜내지 않고 생각나는 순간을 바로 그리는 태도. 그렇게 완성된 웹툰 속 대구는 투덜거림의 대상이 아니라 즐겁고 즐길 것도 많은 도시로 재해석된다.

대구에 대한 감각도 독특하다. 제우준 작가는 대구를 브랜드가 아니라 성격으로 이해한다. 잽싸고 신랄한데 정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도시. 그래서 그의 풍자에는 악의가 없다.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디테일을 가볍게 비틀어 웃음을 주는 방식이다. 그는 선을 넘지 않는 원칙도 분명히 갖고 있다. 정치적 해석을 유도하지 않고 특정 집단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기준이다. 애정이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은 곧 작업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제우준 작가는 대구의 일상을 읽어내고, 자신만의 결을 입히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넓혀가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이제 그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창작자이자 지역의 결을 디자인하는 젊은 디자이너로 자리 잡고 있다. 활동 영역은 넓어지고 있지만 중심은 언제나 대구다. 대구라는 도시가 만들어준 인연 속에서 그의 작업은 단단해졌고, 그는 대구의 시간과 함께 성장해 온 것이다. 취향으로 시작된 일이 직업이 되고, 일은 다시 지역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 제우준 작가. 그는 지역이 청년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청년의 취향을 기다려주고, 열정에 기회를 내어주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를 사랑하는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제우준 작가 같은 청년들이 지역에 많아질 때 지역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은 도시로 성장할 것이다.

 

이미나(청년활동연구가/ 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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